본문 바로가기

사랑과 혁명, 1960년대 청춘의 초상

중앙선데이 2018.08.25 01:00 598호 32면 지면보기
책 속으로
눈 속에 핀 꽃

눈 속에 핀 꽃

눈 속에 핀 꽃
김민환 지음, 중앙북스

원로 언론학자의 두 번째 소설
박정희 정권 시절의 빛과 어둠

 
폐결핵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었던 1960년대, 목포 해양고 재학 중이던 김민환(73) 고려대 명예교수는 이 무서운 질환을 앓았다. 절대 안정해야 한다는 의사에게 그는 물었다. “책은 읽어도 되나요.” 절망의 나락에서 그를 살린 건 동네 선생님의 서재에서 빌려 읽은 문학작품이었다. 국문학과에 진학해 소설가가 되려던 그는 신문방송학과를 권한 담임교사의 진로지도로 구체적인 장래 희망을 품게 된다. “기자가 되자. 그다음에 소설을 쓰자.” 기자 대신 언론학자가 된 그는 은퇴 뒤 전남 완도군 보길도에 남은재(南垠齋)를 짓고 문학청년의 옛꿈을 불태우고 있다.
 
2013년 작『담징』에 이은 두 번째 장편소설 『눈 속에 핀 꽃』은 이런 김 교수의 인생 이모작이 무르익고 있음을 보여준다. 자전 소설의 틀을 빌려 19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중반까지 한국 사회의 한 풍속화를 그려내고 있다. 함께 그 시절을 견뎠다면 쉽게 얼굴을 떠올릴 수 있는 실존 인물 여럿이 등장해 암울한 현실을 박차고 날아오르려 했던 빛과 어둠의 한 연대기를 그려낸다.
 
김 교수 자신이 모델인 듯 보이는 주인공 최영운은 어느 가을날 남해 먼 섬에서 종이상자에 담긴 편지 묶음을 받는다. 50여 년 전 연모했던 여학생 서윤희에게 자신이 보냈던 철필(鐵筆) 서신이었다. 치매가 심해 요양원에 들어간 윤희를 위해 서랍을 정리하다가 딸이 발견한 편지를 실마리로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이야기는 다층적인 사랑의 형태로 변주된다.
 
조선 말기 문인화가인 고람(古藍) 전기의 ‘매화 서옥’. 소설의 주인공 영운은 연인 윤희를 생각하며 이 그림 같은 한시 ‘매화’ 를 떠올린다. [사진 간송미술관]

조선 말기 문인화가인 고람(古藍) 전기의 ‘매화 서옥’. 소설의 주인공 영운은 연인 윤희를 생각하며 이 그림 같은 한시 ‘매화’ 를 떠올린다. [사진 간송미술관]

때는 박정희 군사정권이 장기독재를 향해 대학사회를 옥죄어 오던 겨울공화국 시대였으니 사랑과 혁명을 동시에 밀고 나가는 젊은이의 피는 끓어오른다. 영운이 밝히는 세 가지 삶의 지표, ‘가난하게 산다.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산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산다’는 윤희 집 가훈이 된다. 영운은 ‘독재는 망한다. 민중이 반드시 망하게 한다’는 선언문을 쓰지만 정작 청계천에 들어가 민중과 함께해 법정에 선 이는 윤희였다. 영운은 탄식한다. “아, 내가 문제 학생들에 관한 지도 보고서를 쓰는 조무래기로 왜소해진 동안에, 윤희는 그야말로 큰 사람이 되었구나.”
 
그 또한 윤희를 사랑했고, 두 연인의 내력을 꿰고 있던 윤지형 목사는 어느 날 영운을 찾아와 말한다. “최 형, 윤희는 매화 같은 여자지. 찬 곳에 있게 내버려 둬.” 영운은 윤희와의 이별을 예감하며 눈구석이 아닌 목구멍에서 솟는 눈물을 흘린다. 윤희의 죽음 뒤에 그가 떠올리는 한시(漢詩)도 조선조 시인 홍원주의 ‘매화’다. “홀로 이른 봄빛 누리더니/ 성긴 가지, 달을 띠고 기울었다/ 바람 따라 은은한 향기 날린다/ 옥 같은 나무, 눈 속에 핀 꽃.”
 
1966년 고려대학교 입학 동기인 김훈 소설가는 김 교수의 소설을 ‘세계 최빈국 장기독재의 1960년대를 20대로 지나온 지식인의 청춘 회고록’이라 불렀다. “사랑, 혁명, 배움을 동시에 모두 이루어내려고 현실의 절벽에 몸을 부딪치는 (…) 청춘의 열정 없이는 인간의 미래는 성립되기 어렵다는 것을 이 소설은 보여준다”고 평가한다. 그러면서 “김 교수와 나는 이제 망팔(望八)이다. 돌아보면 먼 길이었지만, 갈 길은 더욱 멀어서 끝이 없는데, 여기쯤에서 한 생애는 저녁을 맞는다”고 썼다.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선데이 배너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