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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가족의 조건

중앙선데이 2018.08.25 01:00 598호 35면 지면보기
고선희 방송작가·서울예대 교수

고선희 방송작가·서울예대 교수

청년의 집은 나지막한 산과 강이 있는 국경지대였다. 땔감을 구하러 나선 그는 수풀 사이에서 탄피를 줍는다. 주위를 살피며 몇 개의 탄피를 더 주워 옷 속에 단단히 숨긴다. 하지만 그는 곧 국경을 수비하던 병사와 마주친다. 애당초 그러려 했던 것처럼 그는 병사에게 탄피를 내준다. 병사는 당연한 듯 챙겨 받으며 말한다, 강을 건너는 사람을 보지 못 했느냐고, 보게 되면 바로 신고하라고. 청년은 끄덕이며 “네” 했지만 숙여진 고개 밑의 표정은 그게 아니었다.
 
몇 해 전 내 수업의 학생이 과제로 제출한 단편드라마의 내용인데, 첫 장면부터 뭔가 많이 달랐다. 배경도 사건도 흔치 않은 것이었고, 상상으로 쓴 것이라 보기 어려울 만큼 묘한 진정성이 느껴지는 대본이었다. 그래서 알아보니 그는 탈북 청년이었다. 적응교육을 마친 후 영상제작 분야에서 일하고 싶다 해서 정원 외 특별입학이 허용됐다는데, 그 사실을 안 순간 먹먹했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다.
 
내가 담당하는 학과가 아닌 타과 소속 학생이고 늘 맨 뒷줄에 조용히 앉았다 가서 주목하지 않은 학생이다. 그저 나이가 좀 있는 만학도인가 생각했었다. 그런데 과제로 낸 짧은 대본을 통해서 그의 출신은 물론 내면까지 보게 되니, 진작 챙기지 못한 게 미안했다. 수년 전 일인데 그가 쓴 대본의 장면들이 지금도 선하다. 탄피를 빼앗긴 청년은 그날 빈손으로 귀가한다. 쓰러져가는 오두막 안에는 홀어머니가 누워있다. 그는 멀건 죽으로 어머니를 챙긴 뒤 말없이 다시 집을 나서 강을 굽어본다. 그리고 장면이 바뀌면, 그는 죽을힘을 다해 강을 헤엄쳐 건너고 있다. 그렇게 혼자 강을 건너 탈북한 그는 중국의 작은 식당 주방에서 일하며 숨어지낸다. 하지만 그의 약점을 잘 아는 식당 주인은 임금을 준다던 약속을 지키지 않고, 결국 그는 식당에 불을 지른다.
 
자신이 겪은 일을 거의 그대로 써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보는 이의 마음을 울리는 글이었다. 대본작성법을 제대로 지켜 쓴 것도 아니고 지문은 허술했으며 대사도 거의 없었는데, 쓰여 있지 않은 사건과 감정까지 다 짐작이 되었다. 그래서 그 학생을 만나 더 많은 이야기를 들어줘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후론 그가 보이지 않았다. 한 해가 더 지난 어느 날 캠퍼스에서 핼쑥한 얼굴의 그와 우연히 마주쳤다. 한번 보자고 했는데 왜 안 왔느냐 물었더니, 그동안 학교에 못 다녔다고 했다.
 
“돈 벌러 갔었어요. 데려오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요….” 그리고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휴학하고 일을 해 돈을 벌었고, 그 돈을 브로커에게 주어 북에 남아있던 가족을 탈북시키려 했었다는, 그런 사연을 공공연히 발설할 수는 없었을 거다. 나도 탈북자들을 취재해 본 적이 있어 대충 짐작은 갔기에 더는 묻지 않았다. 눈에 띄게 말랐고 전보다 더 어두워진 표정인데도 ‘그래 다음에 좀 더 시간이 지난 뒤에 편하게 얘기하자’ 하며 지나쳐 왔다. 하지만 그 후로 학생을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이번 남북 이산가족 상봉행사 뉴스를 보면서 다시 그 탈북 학생과 그의 작품을 생각했다. 탈북으로 발생한 이산가족도 저렇게 만날 수 있는 때가 올까. 그런 시대가 된다면 굳이 이산가족 상봉 행사 같은 게 필요 없을 거다. 서로 만나고 싶을 때 만나고 언제든 함께할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고 보면 ‘함께 하는 시간’만큼 중요한 가족의 조건도 없는 것 같다. 열 집 중 서너 집이 1인가구일 정도로 1인가구 비중이 증가했고 우리나라 출산율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으로 급속히 감소하고 있다는데, 우리에게 가족은 여전히 중요한 화두다. 아니 오히려 이런 시대이기 때문에 가족이 뭔지 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북에 남은 가족을 만나고 싶어 학업도 중단하고 돈을 벌어야 했던 그 남학생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가 바라던 대로 가족을 만나 함께 하고 있길 바란다. 작은 일에도 짜증을 내고, 별것 아닌 걸로 더러 상처도 주면서, 보통의 가족처럼 그렇게 살아가기를.
 
고선희 방송작가 서울예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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