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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누가 ‘바보’고 누가 ‘악당’인가

중앙일보 2018.08.24 00:27 종합 30면 지면보기
김한별 디지털콘텐트랩장

김한별 디지털콘텐트랩장

서해안으로 여름 휴가를 다녀왔다. 차를 몰고 충남·전북 바닷가를 돌았는데, 중간에 터널을 여럿 지났다.
 
길고 컴컴한 터널 속을 달릴 땐 주위가 잘 안 보인다. 멀리 환한 빛이 들어오는 터널 끝만 보게 된다. 소위 터널 시야(Tunnel Vision) 현상이다. 술 취했을 때 시야가 흐려지는 것과 비슷하다고 ‘만취 효과’라고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갑자기 시야가 좁아질 때 묘한 압박감을 느낀다. 그래서 터널 운전을 싫어한다.
 
실제 터널 말고 심리적 터널 시야 현상도 있다. 어떤 일에 몰두하느라 주변 상황의 판단이 흐려지는 걸 가리킨다. 한마디로 나무 보느라 숲을 못 보는 경우다. 이 또한 깨닫고 나면 갑자기 바보가 된 듯 불쾌해진다.
 
더 화가 나는 건 터널 시야 효과를 이용해 누군가 나를 속이려 들 때다. 공공기관이나 소위 전문가들도 종종 그럴 때가 있다. 그들은 주로 숫자와 차트로 ‘장난’을 친다. 숫자는 힘이 세다. 구체적 숫자를 대면 일단 ‘맞겠거니’ 믿게 되는 게 사람 심리다. 거기에 숫자를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차트까지 결합하면 힘이 배가 된다.
 
터널 시야 현상을 이용하는 이들은 “(차트) x축이나 y축을 과감하게 절단한 뒤 일부만 보여주기, 눈금과 눈금 사이의 거리를 엿가락처럼 늘이기, (중략) 교묘한 기술을 써서 작은 것을 크게, 큰 것을 작게 표현”해 “자기들이 보여주고 싶은 것만”(게르트 보스바흐, 『통계의 거짓말』) 보여준다.
 
얼마 전 청와대 카드뉴스 차트가 그랬다. “가계소득증가율이 나아지고 있다”며 최근의 2.1%를 과거의 2.8%보다 더 높게 그렸다. “일자리 질이 좋아지고 있다”며 0.2%포인트와 0.9%포인트 차이의 상용근로자 비율을 같은 기울기로 그리기도 했다. 비판이 일자 담당자는 디자이너가 수작업을 하다 보니 벌어진 일이라고 주장했다. "의도는 없었다”는 거다.
 
국가 데이터 차트를 일일이 손으로 그린다는 것도, 그러다 보니 실수했다는 식의 변명도 참 궁색하다. 독일 통계학자 디터 호흐슈테터는 숫자를 조작하는 이들을 둘로 구분했다. ‘바보’(기법을 잘 몰라 그릇된 통계를 작성하는 이들) 아니면 ‘악당’(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해 통계를 악용하는 이들)으로.
 
터널 비전을 벗어나려면 눈 크게 뜨고 천천히 주위를 돌아봐야 한다. 터널이 싫다고 멀리 돌아가는 건 해결책이 아니다. 심리적 터널 비전도 마찬가지다. “통계와 수치 전부를 불신하는 태도는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행위”일 뿐이다. “숫자 자체를 부정하기보다 숫자를 올바르게 활용할 방법을 고민”(앞의 책)해야 한다. 그러니 눈 부릅뜨고 지켜보자. 누가 ‘바보’고, 누가 ‘악당’인지. 
 
김한별 디지털콘텐트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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