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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지훈의 축구.공.감] 김학범호, ‘금메달=병역 면제’ 생각부터 버려라

중앙일보 2018.08.22 00:02 경제 7면 지면보기
20일 키르기스스탄과의 조별리그 3차전에서도 답답한 경기를 펼친 한국 축구대표팀. [뉴시스]

20일 키르기스스탄과의 조별리그 3차전에서도 답답한 경기를 펼친 한국 축구대표팀. [뉴시스]

41년 전인 1977년 9월11일, 한국축구 역사에 길이 남을 명승부가 벌어졌다. 장소는 서울운동장(지금은 없어진 동대문운동장의 옛 이름), 무대는 제6회 박대통령컵 국제 축구대회였다. 이 대회에 참가한 당시 축구대표팀 1진 ‘화랑’은 예선 첫 경기에서 당시 ‘아시아 최강’으로 평가받던 말레이시아를 상대로 기적 같은 무승부를 이끌어냈다. 서울운동장 내 스탠드의 시계가 후반 38분을 가리키던 시점에 ‘드라마’가 시작됐다. 1-4로 크게 뒤진 채 끌려가던 한국이 공격수 차범근의 막판 해트트릭을 앞세워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 차범근은 후반 38분·42분·44분에 연속 득점하며 패색이 짙던 경기를 4-4 무승부로 바꿔놓았다. 자신감이 살아난 화랑은 인도와 싱가포르, 뉴질랜드를 연파하며 결승에 올랐고, 결승전에서 브라질(상파울루주 선발팀)과 0-0으로 비겨 공동 우승했다.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 출전한 축구대표팀의 경기를 보면서 ‘7분의 기적’을 회상하는 올드팬들이 많다. 지난 17일 조별리그 말레이시아전(1-2패)과 20일 키르기스스탄전(1-0승)을 지켜본 뒤 주요 포털사이트에 올라온 축구 기사에는 “말레이시아와 축구 경기를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볼 날이 다시 올 줄 몰랐다”라거나 “이번에 키르기스스탄이라는 나라가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됐다”는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한국 축구가 40년 전으로 후퇴한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넘쳐났다.
 
말레이시아는 8월 현재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164위, 키르기스스탄은 92위다. 객관적 전력에서 한국(57위)과 격차가 크다. 키르기스스탄전에서 한국은 손흥민(토트넘), 황희찬(잘츠부르크), 황의조(감바 오사카), 이승우(헬라스 베로나) 등 이른바 ‘최정예 공격진’을 가동하고도 단 한 골에 그쳤다. 90분간 26차례의 슈팅을 시도했지만, 그중 상대 골대 안쪽으로 향한 유효 슈팅은 8개뿐이었다. 그 중 단 한 개(후반 18분 손흥민 골)가 득점으로 이어졌다. 국가대표가 즐비한 공격진으로도 키르기스스탄의 23세 이하 어린 선수들이 채워놓은 자물쇠를 제대로 풀지 못했다.
 
아시안게임 준비 과정에서 우리 대표팀이 의도적으로 수비 훈련에 치중한 게 독이 됐다는 지적이 많다. 김학범 감독은 파주에서 소집 훈련을 진행하며 “수비진에겐 조직력과 약속된 움직임이 필수적이지만, 공격수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창의성”이라면서 “우리 골잡이들이 각자의 득점 본능을 마음껏 살릴 수 있도록 패턴 플레이는 가급적 활용하지 않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23세 이하 선수들과 와일드카드 황의조가 손발을 맞춘 바레인전 전반에는 대량 득점(5골)했지만, 손흥민·황희찬 등 A대표팀 공격수들이 전방에 포진하면서부터 오히려 득점력이 떨어지는 모습이다. 지각 합류해 손발을 맞춰볼 시간이 많지 않았던 데다, 훈련의 초점이 수비 조직력에 맞춰진 탓에 창끝을 가다듬을 기회가 부족했던 게 원인으로 꼽힌다. 현재로선 경기를 거듭하며 팀워크와 실전 감각을 함께 끌어올리는 게 급선무다.
 
선수단 내부 분위기에서 부진의 이유를 찾는 시각도 있다. 대한축구협회의 한 관계자는 “금메달이라는 공통 목표 아래 선수들이 함께 도전하고 있지만, A대표팀 출신 선수들과 23세 이하 대표팀 선수들 사이에 이따금 어색한 기류가 감지된다”면서 “대회 직전 급히 팀을 구성했으니 삐걱대는 부분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다. 경기력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수준으로 적절히 통제하는 게 과제”라고 말했다.
 
그래서 김학범 감독뿐만 아니라 ‘캡틴 손흥민’의 리더십이 필수적이다. 손흥민은 기성용(스완지시티)의 뒤를 이어 A대표팀의 차세대 주장으로 거론되는 선수다. 아시안게임 대표팀을 이끌며 체득한 경험이 앞으로 A대표팀에서 요긴하게 쓰일 수 있다. 키르기스스탄전 직후 손흥민은 “아직 주장으로서 부족한 게 많지만, 선수들을 이끌고 나도 솔선수범하는 자세를 보이겠다”면서 “16강 이후부터는 패배하는 순간 도전이 끝난다. 결국 약한 팀이 먼저 집에 가는 거다. 선수들에게 그 부분을 강조하겠다”고 말했다.
 
손흥민의 말처럼 더 이상의 시행착오는 허용되지 않는다. 오는 23일 맞붙는 이란과의 16강전부터는 매 경기가 벼랑 끝 토너먼트 승부다. 이란을 이기더라도 강력한 우승 후보 우즈베키스탄과 ‘결승전 같은 8강전’을 치러야 한다. 전술적·심리적으로 심기일전의 각오가 필요한 시점이다.
 
지금 이 순간 우리 선수들이 금메달을 갈망하는 이유가 ‘병역 면제’라는 ‘제사밥’에 모아지지 않길 바란다. ‘땅에 떨어진 한국 축구의 자존심을 되살린다’는 순수한 각오와 의지가 서로의 희생과 단합을 이끌어내고, 우승에 한발 다가서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송지훈 기자 milky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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