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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사법 엘리트가 벼랑에 몰린 까닭

중앙일보 2018.08.21 00:36 종합 27면 지면보기
강주안 사회에디터

강주안 사회에디터

학창시절 전교 1등을 볼 때마다 ‘저 친구는 공부 귀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더운 여름날 부동자세로 온종일 책상에 앉아있을 수 있을까. 이런 귀신들이 법대에 가서 사법시험을 통과했다. 사시합격자들의 경쟁이 치열한 사법연수원에서 상위 15% 안에 들어야 판사가 된다. 그들 중에서도 선두그룹이 법원의 인사와 예산 권력을 쥔 법원행정처에 모인다. 이렇게 탄탄대로만 걸어 온 엘리트 판사들이 지금 평생 최악의 위기를 맞고 있다. 대법원이 허망한 꿈을 이루기 위해 재판을 걸고 로비를 시도했다는 의혹 때문이다. 판사가 한명씩 검찰청사에 불려가더니 20일에는 서울중앙지법이 검찰의 압수수색을 당했다.
 

대법원, 헛된 꿈 이루려 무리수 … 증거인멸 실패로 민낯 드러나
독일·프랑스처럼 대법관 늘려 시민들이 충실한 재판 받게 해야

엘리트 판사의 비극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이끈 대법원이 ‘상고법원’이라는 아이디어에 집착하며 싹텄다. 문제의 인식은 나무랄 데 없었다. 최근 10년 사이 대법원으로 올라온 사건은 두 배가 됐는데 대법관 수는 그대로이니 재판이 부실해진다는 우려였다. 이런 경우 해법은 두 가지다. 재판 건수를 줄이거나 대법관 수를 늘리면 된다. 이렇게 단순한 해결책을 두고 대법원은 상고법원이라는 카드를 내밀었다. 대법원 재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평범한 사건들은 상고법원을 만들어 처리하고 대법관들은 중대한 판결만 맡겠다는 내용이다. 이를 관철하기 위해 청와대와 정치권·언론·법조계·학계 등 전방위 로비를 시작했다.
 
공무원 조직은 예외없이 자리를 더 만들고 싶어한다. 그런데 왜 대법원은 대법관을 증원하는 대신 새로운 법원을 만들려 했을까. 이런 질문에 법조계 인사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대법관의 희소성을 지키겠다는 거지요.”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대법관이 고귀한 이유는 수가 적기 때문인데 숫자가 많아지면 그만큼 권위가 떨어진다는 논리다. 대법원이 평정심을 잃은 내면엔 헌법재판소를 향한 경쟁심리도 있다고들 본다. 법관 중 최고 성적의 엘리트가 대법관, 그 바로 다음이 헌법재판관이라는 게 대법원 사람들의 대체적인 인식이다. 그런데도 시민들이 대법관보다 헌법재판관을 더 많이 기억한다는 사실을 대법원은 억울해 한다. 사람들이 대법원장 얼굴은 잘 몰라도 머리에 헤어롤을 달고 출근해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고 외치던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의 목소리는 생생하게 떠올린다. 더욱이 대법관은 14명인데 헌법재판관은 9명뿐이니 희소성에서도 밀린다. 이런 판국에 대법관을 더 늘리라니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이런 전교 1등 심리분석에 ‘설마…’하는 생각이 들지만 증거인멸에 실패해 세상밖으로 나온 법원 문건들을 보면 오싹해진다. 대법원은 상고법원을 추진하면서 대법관을 9명으로 줄이는 방안을 연구한 사실이 문건에 나온다. 이럴 경우 헌법재판관과 대법관의 수가 같아진다. 헌법재판관을 변호사 자격이 없는 사람으로 채우는 구상도 있다.
 
대법원의 일탈은 법원 내부의 반발을 불렀다. 한 판사가 상고법원에 반대하는 글을 온라인에 올리자 해당 판사의 사촌이 부장판사임을 알아내 설득에 나서기도 했다. 정보기관을 연상케 하는 방식이다. 검찰을 관할하는 법무부와 변호사 단체까지 회유와 압박의 대상으로 삼았다. 법무부와는 ‘영장’으로 딜을 시도했다. 급기야 대법원은 절대 손대지 말아야 할 재판까지 만지작거렸다.
 
재판으로 장난을 치면 누군가는 횡재하지만 반대편은 평생 한을 품는다. 재판의 공정성이 의심받으면 판사도, 대법관도 가치를 잃는다. 실제로 재판 거래가 있었는지는 검찰 수사를 지켜봐야 한다. 법을 어긴 판사는 처벌을 받으면 된다.
 
하지만 모든 사태의 발단인 대법원 재판의 부실화는 그대로 남아있다. 이건 시민이 피해자다. 좌절된 상고법원을 대신할 해결책은 무엇일까. 많은 전문가들이 “현재 14명인 대법관 수를 늘려야 한다”고 말한다. 대한변호사협회(대한변협)는 일단 24명으로 늘린 뒤 계속 확대하자는 입장을 내놨고 여당에선 26명으로 늘리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대법관이 많아지면 부작용은 없을까. 대법원 파일을 뒤졌다. ‘(150803)VIP보고서’라는 문서에서 관련 내용을 발견했다. 대법원은 ‘대법관 증원론의 위험성 및 허구’라는 대목에서 대법관을 늘릴 경우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출신 등 진보 인사가 최고법원에 진출할 우려가 있다고 썼다. VIP는 통상 대통령을 뜻하니 아마도 당시 박근혜 대통령 입맛을 고려한 맞춤형 보고서로 보인다.
 
대법관 수가 늘지 않았지만 이미 민변 회장 출신인 김선수 대법관이 대법원에 입성했다. 진보 대법관을 막겠다는 대법원의 증원 반대 논리가 머쓱해졌다. 대한변협 자료에 따르면 2014년 기준으로 독일의 연방대법관은 128명, 프랑스의 대법관은 129명이다. 우리도 얼마든 늘려볼 만 하다. 오랜 세월 묶어둔 대법관 수를 푸는 결정이 대법원의 자부심을 어느 정도 훼손할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나 재판의 신뢰를 무너뜨린 죄값을 치르는 차원에서라도 대법원은 증원론을 받아들여야 한다.
 
강주안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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