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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현대화? 아내 의심한 한 남자의 비극 이야기할 뿐”

중앙선데이 2018.08.18 02:00 597호 14면 지면보기
‘판소리 오셀로’ 연출가 임영욱·배우 박인혜
연출가 임영욱(위)과 배우 박인혜

연출가 임영욱(위)과 배우 박인혜

오셀로와 처용, 이 두 남자에겐 공통점이 있다. 아내의 외도를 의심한다. 그런데 둘의 운명은 사뭇 다르다. 질투와 파국으로 이어지는 오셀로의 비극에 비해 처용은 통크게 양보해 상대를 퇴치한다. 닮은 듯 다른 두 남자의 운명이 엇갈린 지점은 어딜까. 궁금하다면 ‘판소리 오셀로’(8월 25일~9월 22일 정동극장)를 권한다.전통에 기반한 다양한 창작공연을 선보이는 정동극장 기획 ‘창작ing 시리즈’의 올해 첫 무대를 장식할 ‘판소리 오셀로’는 판소리를 매개로 동시대적 주제와 감성을 다루는 창작집단 ‘희비쌍곡선’의 작품이다. 지난해 말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의 동시대예술페스티벌 초연 당시 좋은 반응을 얻어 서울에서 장기공연기회를 얻었다. 해묵은 셰익스피어와 판소리가 만나 어떻게 동시대적 감성으로 재탄생했을까. ‘희비쌍곡선’의 작가 겸 연출가인 임영욱(37)과 작창·음악감독이자배우인 박인혜(34)에게 미리 살짝 들어봤다.
 

우리는 판소리의 현대화, 대중화를 도모하지 않습니다.

 
‘희비쌍곡선’의 두 축, 임영욱과 박인혜의 이구동성은 퍽 도발적으로 들렸다. 지난해 한 언론사 주최 문화대상을 수상한 허먼 멜빌 소설 원작의 ‘필경사 바틀비’를 비롯해 독일 설화에 기반한 ‘레겐트루데-비와 꿀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 흥보가를 개작한 ‘박흥보씨 개탁이라’ 등 판소리를 이용한 다양한 고전 재해석 레퍼토리를 토해내며 업계의 이목을 끌면서도 “판소리를 어떻게 해보겠다는 게 아니”란다. ‘결국 창작 판소리하는 팀 아니냐’는 물음에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답하는 이들의 정체가 알쏭달쏭했다. 이들도 할 말이 많아 보였다.  
 
“지금 판소리를 매개로 하고 있지만, 꼭 판소리를 고수한다고 할 수는 없어요. 이야기와 작품의 주제가 더 중요하죠.”(박인혜)  
 
“우리가 표현하고 탐구해보고 싶은 걸 하는데, 지금 우리가 가장 잘 아는 매체가 판소리인 거죠. 영상이나 연기, 무용이 대등하게 들어올 수도 있어요. 창작에 있어 해당 테마나 감성을 다루는 작업언어로서 얼마나 적절한가를 기준으로 삼고 있거든요.”(임영욱)  
 
판소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야기
'판소리 오셀로' 중에서

'판소리 오셀로' 중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대체불가능한 존재다. 판소리를 극이 아닌 음악으로 접근해온 소리꾼 박인혜와 창작 판소리를 기획하다 벽에 부딪혀 연극으로 돌아섰던 임영욱은 서로를 통해 ‘극예술로서의 판소리’의 무한한 가능성에 눈떴고, 팀을 이뤘고, 시너지가 폭발했다.  
 
“2013년에 처음 ‘비단치마’라는 판소리 기반 모노드라마 작업을 같이 했어요. 그때 인혜씨 작창에 매료됐고, 2015년 보안여관이라는 독특한 공간을 배경으로 ‘같거나 다르거나 춘향가’ 공연을 하면서 판소리와 연극적 미장센이 잘 만날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발견했죠. 보통 창작 판소리하는 분들은 판소리 원형이나 본질 안에서 현대적 테마나 대중적 기호를 만족시키려 하죠. 하지만 우린 동시대적 감성의 표현 욕구가 먼저고, 거기에 판소리를 비롯해 다양한 장르의 미장센을 적극 활용하는 거예요.”(임)
 
“그래서 작품마다 스타일이 달라요. 어떤 작품은 다분히 연극적이고 어떤 작품은 렉처같기도 한데, 다행히 이런 형태의 공연들을 좋아해 주셔서 팀 결성하고부터 일이 많이 들어오더군요. ‘오셀로’도 우리 기획이 아니라 아시아문화전당이 먼저 제작의뢰한 것이구요. 둘이 함께 하면서 빵 터진거죠.”(박)  
 
셰익스피어는 첫 도전인데, 판소리와 잘 어울리는 조합인가요.  
임영욱 판소리가 어디까지 포용할 수 있느냐에 재미를 느껴요. 원 텍스트의 질감을 판소리가 받아들였을 때 어떤 게 수용되고 어떤 게 부딪치는지 잘 구분해야 하죠. 셰익스피어가 연극이 아닌 판소리일 때 판소리만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느냐가 문제인데, 저는 판소리의 독특한 포용력이 공연예술 전체의 대안이 될 수 있다 생각해요. 막이나 장이 아니라 ‘대목’ 중심의 서사가 가진 독특한 느슨함이 있거든요. 일관된 서사를 갖되 대목 사이가 성기게 벌어져 있어서 그 사이에 우리가 원하는 담론을 끼어넣을 수 있죠. 드라마와 서사극적 개방성을 동시에 가진 게 판소리만의 고유한 힘이고, 이걸 동시대 예술에 적용하려는 게 저희 작업이에요.
박인혜 동시대를 반영한다는 게 원 텍스트의 인물을 현대인이나 서양악기 개념으로 푸는 게 아니에요. 판소리 양식 자체가 긴 시간 동안 많은 계층을 오가며 쌓여온 적층예술이기에 중간에 다른 이야기, 다른 가치관이 끼어들 수 있는 현대적이고 세련된 양식이란 말이죠. 그래서 많은 것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얘긴데, 이런 얘길하는 연출이 저는 너무 자랑스러워요. 판소리에 접근하면서도 판소리의 이면까지 분석하는 연출이 많지 않거든요. 판소리의 민족성에 주목한 ‘전통 현대화’란 말이 창작에도 영향을 주는데, 우리는 거기서 자유롭고 싶어요.  
 
동시대적 감성을 다룬다면서 지금 오셀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임영욱 작년에 아시아문화전당이 먼저 여성 1인극으로 ‘햄릿’이나 ‘맥베드’를 하자고 제안했는데, 우린 거대한 서사보다 인간의 정념, 욕망만 오롯이 다루고 싶었어요. ‘여성 화자’라는 전제가 있으니 여성이 비참하게 희생되는 작품에서 발생하는 독특한 느낌이 있지 않을까 싶었구요. 그렇다고 페미니즘적으로 재해석한건 아니에요. 서구에서 들어온 현대적인 페미니즘이 아니고 동양적인 세계관에서 불교적인 수용성, 포용성 같은 넓은 의미의 여성성으로 부드럽게 원작을 감싸고 싶은 거죠. 
박인혜 처용과 오셀로가 비슷한 구석이 많잖아요. 이방인이 신분이 상승해 예쁜 아내를 얻었는데, 처용은 아내를 뺏겨도 초탈한 모습인데 반해 오셀로는 질투에 사로잡혀 비극적 결말을 스스로 초래하죠. ‘마음 다스리기’에 달린 문제인데, 오셀로의 질투나 데스데모나의 강박에 대해서도 관객과 어떤 지점에서 공감대를 가질 것인지가 관전포인트가 될 것 같아요.  
임영욱 감정에 휩쓸리느냐 절제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거죠. 원작에 없지만 화자가 오셀로에게 ‘질투란 짐승에게 결코 먹이를 주지 말라’고 당부하는 대목을 넣었는데, 자기 마음을 관조하는 여유를 잃지 말라는 애틋한 당부가 서구중심적 세계관에서는 발현되기 힘든 다분히 동양적인 가치라 생각해요.  
 
동양적·여성적 세계관으로 바라본 오셀로
음악은 전부 국악기가 담당한다. 가야금·아쟁·피리·타악 연주자 4명이 각자 2개 이상의 악기를 도맡는다. 그렇다고 ‘전통 원형 찾기’ 컨셉트는 아니고, 판소리가 주가 되는 극에 결이 제일 잘 맞는 게 전통악기라는 판단에서다. “서양악기를 많이들 쓰는 이유는 판소리가 잘 못하는 걸 서양악기에 의존하려는 것이죠. 주로 달달한 로맨스 같은 서정성 측면에서 많이 쓰는데, 이 작품에는 전통악기의 담백함이 더 결이 맞다고 생각해요. 그걸 지금 연주자들이 해내고 있구요.”(박)


“한국악기 앙상블 안에서 현대적 정서를 담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요. 감정 표현에서 화성을 사용하는 건 국악기 편성으로 안된다는 걸 인정하는 건데, 우리 생각엔 될 것 같거든요. 매번 그걸 고민하고 확인하는 게 우리 일이죠.”(임)  


“오셀로의 강렬한 분노를 피아노의 ‘꽈과과광’으로 표현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 더 좋은게 사람 목소리예요. ‘음성으로 조진다’고 할까요.(웃음) 오셀로가 말과 노래를 넘나들면서 판소리 거친 톤을 과장되게 사용하는데, 이런 지점이 판소리의 또다른 포용력이에요. 소리꾼의 다양한 음성·볼륨·악상이 창작에 있어 하나의 포용력이 되는 거죠.”(박)  
 

판소리의 포용력이 공연예술 전체의 대안이 될 수 있다 생각해요. 막이나 장이 아니라 ‘대목’ 중심의 서사가 가진 독특한 느슨함이 있거든요 

'판소리 오셀로' 중에서

'판소리 오셀로' 중에서

 
이번 공연은 이들에게 각별한 의미다. 난생 처음 해보는 장기공연인 것이다. 창작 활동을 지원금에 기댈 수밖에 없는 민간단체가 어렵게 작품을 만들어도 묻히기 쉬운 전통예술 생태계에서, 국립기관의 제작으로 레퍼토리 장기공연을 한다는 것은 흔치 않은 기회다.  
 
“정동 ‘창작ing’의 가장 큰 매력은 우리 공연을 많은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다는 거예요. 작년에 광주에서 4회한 것도 굉장히 많이 한 편이거든요. 수요관객층이 별로 없으니까요. 장기공연을 하고 싶은 이유는 많은 관객에게서 다양한 피드백을 듣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베스트를 보고 싶어서죠. 우리끼리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22회가 쌓이면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아주 큰 기점이 될 것 같아요. 민간단체에게 정말 큰 선물이죠.”(박)  
 
“기획자, 창작자가 각자 기본으로 돌아가 각자의 돌파구를 마련한다면 민간에게도 기회가 열리겠죠. 우리가 판소리 현대화·대중화를 굳이 외치지 않아도 우리 욕구대로 재미나게 작업하다 보면 기회도 많아지고, 결국 판소리 현대화·대중화로도 이어지지 않을까요.”(임)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신인섭 기자·정동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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