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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의 문명기행] 사람은 달아났는데 왜적 침입 물리친 벌들의 전설

중앙일보 2018.08.16 00:38 종합 27면 지면보기
이훈범 논설위원

이훈범 논설위원

‘문명기행’ 1회가 나간 뒤 ‘거풍’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왜 궁금한지 모르겠지만, “그래, 너도 했냐”고 묻는 사람들 많았다. “나도 한번 해보겠노라”는 사람도 제법 있었다. 심지어 여성도 있었다. 앞으로 산에 오르면 못 볼 거 많이 보게 되는 건 아닌지 두렵다. 거풍이 뭔지 모르는 사람은 ‘문명기행’ 1회(중앙일보 8월 2일자)를 찾아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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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오른 자가 패권 차지
롯데타워서 파주까지 한 눈에
역성혁명 조롱한 비봉의 전설
버선발로 올라 바로잡은 추사

북한산 향로봉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왼쪽 멀리 잠실 롯데월드타워에서부터 오른쪽 파주 일대까지 한강과 임진강 물길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하와 지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니 군사적 요충이요, 도읍지 터를 찾는 적소가 아닐 수 없다. [이훈범 기자]

북한산 향로봉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왼쪽 멀리 잠실 롯데월드타워에서부터 오른쪽 파주 일대까지 한강과 임진강 물길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하와 지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니 군사적 요충이요, 도읍지 터를 찾는 적소가 아닐 수 없다. [이훈범 기자]

거풍도 좋지만 정상 오름의 보상은 무엇보다 눈 시원한 전망이다. 해발 535m 향로봉만 올라도 롯데월드타워부터 파주에 이르는 한강~임진강 물길이 한눈에 들어왔다. 강변을 따라 60㎞ 거리인데도 말이다. 가물가물 서해 바다와 오롯 또렷 북녘땅도 보였다. 산하가 다 드러나니 예로부터 군사적 요충이 아닐 수 없었다. 북한산에 오른 자가 한강 유역을 차지했다. 세 나라가 패권을 다투던 삼국시대에 특히 그랬다. 처음엔 백제 땅이었다. 일대를 한산(漢山)이라 했고 산은 횡악(橫嶽)이라 불렀다. 고구려가 빼앗아 북한산군이라 고쳤지만 산 이름은 그대로 횡악이었다. 다시 신라에 빼앗긴 땅은 북한산주가 됐고 산은 부아악(負兒岳)이라 불렸다. 그렇게 산은 패권 향배의 나침반이 됐고, 패권은 그 바늘이 가리키는 곳으로 옮겨갔다.
 
임진왜란 때 왜군에게도 의당 요충지였다. 하지만 북한산을 점령하진 못했다. 북한산 사찰마다 승병들이 있었던 까닭이다. 험한 산길을 마당 뛰듯 하는 승병들의 게릴라전을 당해내기 힘들었으리라. 하지만 다른 야사(野史)도 전한다. 벌들의 공격에 왜군이 달아났다는 거다. 다시 오를 생각을 못 하고 산 아래 객사에만 머물렀다. 사람들은 달아나기 바쁜데 벌들은 국토를 유린한 자들을 용서하지 않았으니 과연 이 땅의 주인은 누구인가. 당시 왜적이 들이닥치자 인수봉을 맨손 맨발로 넘어 달아난 사람이 있다는 증언도 기록에 남아있다. 사실이라면 아마도 국내 최초의 인수봉 등정자가 될 터다.
 
오늘날엔 벌들이 별로 없다. 대신 모기가 극성이다. 초유의 폭염에 모든 모기가 산으로 피서를 왔는지, 걷는 내내 귓가에서 앵앵거린다.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모기 쫓는 약을 몸에 뿌린다. 하지만 등산 초보는 수건을 뒤집어쓰고 손으로 털며 오르는 수밖에 없었다. 잠시라도 서면 모기가 달려들어 힘들어도 쉬지 못하고 내쳐 걸어야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해발 500m 가까이 이르자 모기가 자취를 감췄다. 범절 있도다, 모기여! 이만큼 오른 사람은 산을 즐길 자격이 있고, 그런 사람을 공격하는 건 불량배들이나 하는 짓인 거다. ‘모기 문(蚊)’자에 ‘글월 문(文)’이 들어간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지세를 한눈에 살필 수 있으니 옛사람들은 도읍지를 택하려고도 산 정상에 올랐다. 그런 이유로 북한산에 처음 오른 건 백제 건국자 소서노와 두 아들 비류, 온조였다. 소서노는 지금의 서울 강북에 도읍을 정했으나 그녀가 죽은 뒤 두 아들은 나라를 나누기로 하고 비류는 미추홀(인천), 온조는 위례홀(하남)로 도읍을 옮겼다. 하지만 미추홀은 습지가 많고 물이 짜 살기 어려웠다. 비류가 실망해 죽자 백성들이 위례로 이주해 하나로 합쳤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다르게 말한다. 북한산에 올라 신하들이 하남 땅을 추천했으나 비류가 말을 안 듣고 바로 인천으로 갔다는 것이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이를 비판한다.
 
“소서노를 쑥 빼고 첫머리에 비류·온조의 미추홀과 하남 위례홀의 분립을 기록하고, 온조왕 13년에 다시 하남 위례홀로 도읍을 옮겼다고 기록하니 그러면 온조가 하남에서 하남으로 천도한 게 되니 어찌 우습지 않으랴!”
 
그게 아니더라도 두 아들이 분가하는데 결정권이 없었다면 소서노가 장남 놔두고 차남 따라 하남으로 갔다는 것도 상식 밖이다. ‘원조 마초’ 김부식이 (남자들에게) ‘위험한 여인’ 소서노를 역사에서 지우려다 보니 붓끝이 꼬인 것이다. 오늘날 불붙은 젠더 갈등의 역사는 이처럼 오래다.
 
다음으로 택리(擇里)를 위해 북한산에 오른 건 조선 초 무학대사다. 그에 대해선 전설이 많다. 무학대사가 비봉에 올랐다 ‘무학이 잘못 알고 올라오다’라고 새겨진 비석을 보고 화들짝 놀라 내려갔다는 얘기도 그중 하나다. 무학이 왕십리에서 “소만큼 미련하다”는 농부의 조롱을 들었다는 얘기처럼, 역성혁명 세력에 대한 야유에서 출발했을 터다. 도읍지 터 하나 못 고르는 주제들이 혁명이라니…. 실없이 남 말 하기 좋아하는 인간 속성은 시대 기술이 허락하는 최대치만큼 발현된다. 퍼지는 속도가 늦으면 사라지는 속도도 늦다. 무학비 전설은 조선 후기까지 살아남았다.
 
때로는 의도적으로 거짓이 끼어들기도 한다. 가짜 뉴스가 오늘날에만 판친 게 아닌 거다. 백제 무왕의 ‘서동요’서부터, 고려 말 이자겸의 주제넘은 ‘목자득국(木子得國)’, 조선 중기 조광조를 해친 ‘주초위왕(走肖爲王)’까지 시대마다 있었다. 때는 물론 장소도 가리지 않는다. 서양 중세 때 특정한 소문을 퍼뜨리려는 사람들은 방랑시인들 주머니에 뒷돈을 찔러줬다. 저글링 같은 공연도 해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시인들은 정치적 또는 개인적 메시지가 담긴 시를 읊었다. 이런 시를 ‘시르방트(sirvente)’라고 했다.
 
비봉의 거짓 전설을 바로잡은 게 추사 김정희다. 두 번이나 비봉에 올랐다. 오늘날에도 전문 장비 없이는 등정이 금지된 위험한 봉우리다. 나는 보기만 해도 아찔해 오를 엄두도 못 냈다. 그런 곳을 버선발로 올랐으니 참으로 대단한 집념이다. 그는 비의 탁본에서 ‘진(眞)’자를 발견해 신라 진흥왕순수비임을 밝혀냈을 때의 감격을 논문 『진흥이비고(眞興二碑攷)』에 남겼다.
 
“1200년 전 유적이 하루아침에 밝혀지니, 무학비라는 황당무계한 설이 변파(辨破)됐다. 금석학이 세상에 도움되는 바 이런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어찌 우리가 밝혀낸 일개 금석의 인연으로 그칠 일인가.”
 
이훈범 논설위원
 
>> 8월 30일자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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