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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읽기] 둘 사이에 잔잔한 기쁨의 강물이 흐르네

중앙일보 2018.08.15 00:28 종합 24면 지면보기
문태준 시인

문태준 시인

어떤 공간에 들어설 때마다 벽에 걸린 액자들을 보는 버릇이 생겼다. 대개 액자에는 사진, 풍경화와 정물화 같은 것이 걸려 있다. 그리고 가끔은 짧은 경구를 걸어두는 곳도 있다. 최근에 내가 만난 문구는 “군자의 사귐은 물같이 담백하지만, 소인의 사귐은 단술처럼 달콤하다”라는 뜻의 한문 문장이었다. 알고 보니 장자의 말씀이었다. 환심을 사려고 알랑거리는 말이나 행동이 없는 것이 군자의 교제라는 뜻이다. 이처럼 사귐이 맑아야 사귐이 두터워진다는 뜻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반면에 소인의 교제는 추켜세움에 과잉이 있고, 입맛에 맞추는 말이나 행동이 잦다는 것이니, 이러한 연유로 소인의 사귐은 머잖아 끊어지게 된다는 뜻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폭염 안부 문자 한 통에 부채 바람의 시원함 느껴
휘어진 난초 이파리를 허공이 보듬듯 살았으면

벽에 걸려 있던 이 문장을 접하고 나서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실로 요즘은 혼자 살 수 없는 세상이다.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사귐은 피할 수 없다. 게다가 초면인 사람과의 만남도 훨씬 다양해지고 있다. 언어와 국경의 벽도 거의 사라졌다.
 
그렇다면 촘촘하게 중층적으로 서로 얽히게 되는 요즘 시대에 물 같이 담백한 관계 맺음은 어떤 것일까. 나태주 시인의 시 ‘기쁨’을 읽어보면 어떨까 싶다. “난초 화분의 휘어진/ 이파리 하나가/ 허공에 몸을 기댄다// 허공도 따라서 휘어지면서/ 난초 이파리를 살그머니/ 보듬어 안는다// 그들 사이에 사람인 내가 모르는/ 잔잔한 기쁨의/ 강물이 흐른다”.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난초 화분 하나가 있는데, 이파리가 휘우듬하게 휘어져 있다. 곧 무너지거나 꺾일 듯이. 이파리는 슬며시 허공에 몸을 기댄다. 그랬더니 허공이 이파리를 따라 휘어지면서 이파리를 받쳐 안는다. 마치 허공에게 보이지 않는 큰 손이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난초의 이파리와 허공 사이에 잔잔한 기쁨이 강물처럼 흐른다. 둘 사이의 주고받음이 이 시에서의 난초 이파리와 허공 같으면 어떨까 싶다. 조용한 요구에 조용한 응답이 있는 것, 어떤 부름에 낮은 목소리의 대답이 있는 것, 모자라는 것을 가만히 채워주는 것, 말하지 않아도 짐작하고 헤아리는 것, 거만하지 않고 정중한 것, 들으면서 기다리는 것, 마음이 굳어지지 않게 살피는 것 등이 관계를 담백하게 가꾸지 않을까 싶다.
 
관계는 말로써 이뤄지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엽서나 편지의 운치 있는 글도 그 감동이 오래간다. 나는 얼마 전 한 선생님으로부터 한 통의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몸이 불편하신 선생님은 오히려 이 염천에 나를 염려하시며 문자를 보내오셨다. “폭염의 불길이 세상을 덮는데 무탈하게 잘 지내는가. 용맹정진의 마음으로 선방 방석에 앉아 한여름 난다는 옛 도반의 소식에 거저 합장하고 더위 생각 잠시 거둬보네. 건강 잃지 말고 시의 그릇에 좋은 시들 채우며 여름 건너가시게.”
 
이 말씀에는 아름다운 향기가 그득했다. 말씀에서 부채 바람 같은 것이 시원하게 일었다. 폭염에 시들해져서 누운 풀처럼 지내다 이 말씀을 받으니 의욕이 다시 생겨났다. 그리고 백거이가 쓴 한시도 생각났다. “사람들 더위 피해 미친 듯이 뛰어도/ 참선하는 스님은 꼼짝 않고 앉아 있네/ 참선하는 방이라고 안 더울 리 없건만/ 마음이 고요하니 몸은 절로 서늘해”라고 백거이는 썼다. 어쨌든 선생님의 말씀 그 행간에서는 자상한 배려의 마음이 선선한 바람 한 자락과 함께 불어오는 것만 같았다.
 
물 같은 맑은 관계를 생각할 때 떠올리게 되는 짧은 편지글이 하나 있다. 박희진 시인으로부터 새 시집을 받고 그 답례로 박용래 시인이 1976년 한로(寒露) 이틀 전에 보낸 편지에는 고아한 멋이 있다. “이 크나큰 감동과 환희를 부여안고 지금은 가을입니다만 눈 오는 겨울까지 눈을 꼭 감고 싶습니다. 일체의 외부와의 접촉도 차단하고 싶습니다.”라고 썼다. 요즘의 세태로는 선물을 받고서도 답례를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박용래 시인의 짧은 편지에는 받은 것에 대해 도로 갚으려는 마음이 간곡하게 느껴졌다.
 
올해의 여름날처럼 연일 혹독한 무더위가 이어지다 보면 사람을 대하는 일이 내 마음처럼 되지 않을 때가 많다. 마음도 지치고 고달프게 된다. 이럴 때일수록 옆을 돌아보면서 안부를 묻고, 작은 것이라도 챙겨줄 일이다. 천양희 시인은 시 ‘나를 살게 하는 말들’에서 “얼음이 녹으면 봄이 된다는 말이/ 나를 살게 한다/ 불완전하기에 세상이 풍요하다는 말이/ 나를 살게 한다/ (…)/ 그중에서도 나를 살게 하는 건/ 사람을 쬐는 것도 필요하다는 말”이라고 노래했다. 이처럼 우리는 사람을 쬘 수밖에 없으니, 둘 사이에 잔잔한 기쁨의 강물이 흐르도록 할 일이다.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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