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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기의 시시각각] 김제동이 NPR의 진행자였다면

중앙일보 2018.08.15 00:20 종합 26면 지면보기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수년 전 도쿄 특파원 시절 동료가 들려준 실화다. 집에 인터폰이 울렸다. 모니터엔 NHK 완장을 찬 이가 서 있었다. 순간 지인이 알려줬던 ‘수신료 안 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떠올랐다고 한다. 그러곤 인터폰 너머 NHK 수금원에게 떠듬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와.타.쿠.시와 엔 에치 케이, 다베마셍(난 NHK를 안 먹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일본어에 수금원은 수금을 포기하고 돌아갔다. 주변의 일본인 지인 상당수도 수신료를 내지 않았다. “월 1310엔(약 1만3400원)이 부담스럽다” 등 이유는 각양각색. 하지만 NHK는 납부를 강요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그만큼 ‘공영방송’에 자신감이 있다는 얘기다. NHK 뉴스나 시사 프로그램의 정치적 편향성을 문제 삼는 이는 본 적이 없다. 그런 소지의 인물이 진행을 맡는 걸 본 적은 더더욱 없다. 공영방송의 ‘절대 생명’은 공정성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공영방송 시사프로 생명은 공정성
정치성향 드러낸 만큼 스스로 포기해야

미국의 공영방송은 아예 별도 수신료가 없다. 주 정부·일반인의 기부금과 프로그램 수입으로 운영한다. 그런데도 공공성은 어느 나라 못지않다. 전국 1000곳 넘는 공영 라디오방송국들의 ‘스테이션’ 격인 NPR은 시사 토크쇼 ‘토크 오브 더 네이션’을 진행하던 후안 윌리엄스의 ‘외부 발언’ 하나를 문제 삼았다. 윌리엄스는 NPR 전속이 아닌 여러 매체에 출연하는 방송인이었는데, 그가 폭스뉴스에 출연해 “비행기에 탈 때 무슬림 복장을 한 이를 보면 긴장하게 된다”는 말을 했다. 윌리엄스는 바로 해고 통보를 받았다. 공영방송에서 한 발언도 아니고, 다른 민방에 나가 한 발언 한마디를 갖고 “공영방송의 공정성을 해쳤다”고 한 것이다. 엄격한 잣대다.
 
공영방송 KBS가 방송인 김제동씨를 시사 토크쇼 진행자로 내세운다고 한다. 개그맨 출신 방송인이라고 뉴스나 시사프로 진행자가 되지 말란 법 없다. 공영방송 또한 시사 토크쇼를 할 수 있다. 다만 정치적 편향성을 지닌 인물이 프로를 진행하는 건 별개 문제다. 첫째, 수신료를 거둘 명분이 사라진다. 민영방송에서의 정치 편향이야 그 채널을 안 보면 그만이다. 하지만 월 2500원씩 전기요금에 합산해 꼬박꼬박 수신료를 걷어 가는 공영방송이 정치적 편향성을 드러낸다면 그 반대 성향 시청자에겐 ‘세금 도둑’과 다름없다. 둘째, 상식의 문제다. KBS는 “뉴스가 아니라 토크쇼”라 해명했다지만 뉴스건 토크쇼건 정권 입맛에 맞는 ‘그 정권 사람’에게 맡긴다는 발상 자체가 위험하고 오만하기 짝이 없다. 과거 정권에서 그 말로가 어땠는지 뻔히 봐 놓고, 또 같은 길을 되풀이하려 한다. 그럴 거면 차라리 관영방송으로 이름을 바꾸는 게 낫다.
 
김제동씨는 억울해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그동안 행보가 의구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2년 전 사드 배치 철회 집회에선 “뻑하면 종북이라고 한다. 그래서 난 경북이다. 이 XX들아”고 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국면에선 “누가 이기나 봅시다”고 맞짱을 떴다. 김씨는 스스로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고 주인 된 목소리를 드러내는 게 헌법 정신에 부합한다. 난 헌법적 권리를 포기할 생각이 없다”고 밝힌 바 있다.
 
다시 미국의 공영방송 NPR. 윌리엄스를 해고한 사장 비비언 슐러의 성명(2010년)은 이랬다. “우리 공영방송의 뉴스·시사 프로그램 리포터·진행자, 그리고 분석가들은 논란이 있는 문제에 대해 자신들의 관점을 주입해선 안 된다. ‘그들의 스토리’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스토리(the story)’를 보도해야 한다.” 그들이라고 헌법적 권리가 없었을까. 김제동씨와 KBS의 답을 듣고 싶다.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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