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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신뢰 없는 금융에 미래가 있나

중앙일보 2018.08.13 00:22 종합 27면 지면보기
나현철 경제연구소 부소장·논설위원

나현철 경제연구소 부소장·논설위원

#중소기업을 하는 친구로부터 하소연을 들었다. 지난해 8월 연 3.1%로 10억원 기업대출을 받았는데 1년 만기가 되자 은행이 금리를 1%포인트 높여 달라고 한다는 거였다. 말이 안 되는 요구였다. 그동안 한국은행 기준금리는 1.25%에서 1.5%로 0.25%포인트 올랐고 시중금리 상승 폭도 엇비슷했다. 친구가 항의하자 담당자는 ‘거래실적이 적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거래실적 얘기는 약관에 나와 있지 않았다. 녹취록에도 이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친구는 “금리가 오른 만큼 더 달라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근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무조건 네 배를 더 내라고 하는 건 분명한 갑질”이라고 호소했다.
 
#10년 전 월납입식 변액연금을 들었던 보험사에 전화를 했다. 121개월간 부었는데 원금이 안돼 사실상 반토막이 났다. 800선이던 주가가 2300으로 올랐는데도 그렇다. 상담사에게 따져 물으니 ‘장기투자상품이라 그럴 수 있다’는 말만 한다. 이해가 안 됐다. 수익을 내려면 30~40년쯤 기다리라는 얘긴지, 아니면 주가가 8000쯤 돼야 수익이 난다는 얘긴지. 가입 때 설명대로라면 우량 종목에 장기투자해 5, 6년째 벌써 흑자가 됐어야 한다. 더욱 어이없었던 건 해지하겠다고 말한 다음이었다. 상담사가 급해지더니 설계사 한 명을 소개시켜줬다. 설계사는 전화로 ‘더 이상 손해를 안 보도록 연 2.6% 확정금리 상품으로 전환시켜주겠다’고 했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는 “사실 가입 7년부터 있는 제도인데 보험사나 설계사가 고객에게 잘 안 알린다”고 설명했다. 이유를 물어보니 “전환시켜주면 회사나 설계사가 갖는 수수료가 없어지기 때문”이란다. 고객보다 회사 수익이 먼저인 보험사의 민낯을 보는 순간이었다.
 
금융권은 요즘 기본적인 시스템 부실로 홍역을 치르는 중이다. 은행들은 대출금리를 부당 산정해 고객들의 돈을 갈취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금융감독원의 검사 결과 경남은행 1만2900건, KEB하나은행 252건, 씨티은행 27건 등이 적발됐다. 광주, 제주, 전북, 수협 등 4개 은행은 자체 점검으로 294건의 대출금리를 잘못 매긴 사례를 확인했다고 금감원에 신고했다. 증권업계도 삼성증권 유령주식 배당 사건을 통해 내부 통제와 주식매매 시스템의 부실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얼마 전까지 자살보험금 지급으로 시끄럽던 생명보험사들은 요즘 다시 즉시연금 미지급금을 둘러싸고 고객 및 금감원과 분쟁을 겪고 있다. 모두가 해당 업종에서 가장 기본적인 사안을 둘러싼 분쟁들이다. 혹시라도 고의였다면 용서 못 할 범죄이고, 실수였다고 해도 아마추어라는 비판은 피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금융권이 사회적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도 아니다. 금융권은 요즘 한창 사람 줄이기에 몰두해 있다. 최근 3년간 국내 금융사 321곳의 고용이 1만385명 줄었다. 돈을 많이 버는 은행이 9725명이나 줄이며 앞장을 섰다. 그럼에도 은행들은 절반 이상이 외국인인 주주를 위해 배당률을 높여 주가 부양에만 몰두한다는 지적을 받는다. 박근혜 정부 때는 마지못해 국내 벤처와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시늉을 했지만 지금은 이런 소식도 거의 들리지 않는다. 그런 와중에 돈 많은 고객이나 임직원 자녀는 채용비리를 저질러서라도 살뜰히 챙겼다.
 
한마디로 지금의 우리 금융권은 고객으로부터도, 사회로부터도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 본업을 잘하지도, 사회적 기여를 하지도 못한다. 다만 인건비를 줄여 얻는 단기 이익을 높여 경영진의 ‘장수’를 도모하는 데 바쁠 뿐이다. 그러니 보수정권도 못하던 은산분리 완화에 문재인 정부가 시동을 걸지 않았나 싶다. 우리 금융권은 외환위기 때 150조원에 달하는 공적자금을 지원받은 아픈 역사가 있다. 어쩌면 그 돈의 힘으로 지금 살아있다고도 볼 수 있다. 신뢰라는 기본적 가치를 우리 금융권이 조속히 회복하지 않으면 언젠가 금융사 회장님부터 AI로 바꾸라는 요구가 국민들 사이에서 터져 나올지 모른다.
 
나현철 경제연구소 부소장·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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