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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의 시시각각] “문을 열면 집을 뺏긴다”는 분들

중앙일보 2018.08.10 00:19 종합 30면 지면보기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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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인내심의 크기는 곳간에 비례한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그걸 잘 알았다. 그의 ‘햇볕정책’은 오래 준비된 남북 평화 구상이었지만 서두르지 않았다. DJ는 우선 곳간부터 채웠다. 집권 후 2년여 경제 살리기에 올인했다. 재벌 개혁의 고삐를 바짝 죈 것은 물론 진영의 반대를 무릅쓰고 정리해고를 받아들였다. 1999년 IMF(국제통화기금) 졸업 선언을 마친 후에야 2000년 6월 비로소 남북 정상회담의 문을 열었다. DJ는 자신의 꿈을 위해 국민의 인내심을 시험하지 않았다.
 
같은 꿈을 꾸는 문재인 대통령이 이를 모를 리 없다. 집권 1년여, 경제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한껏 커졌다. 최저임금과 주 52시간, 과속의 후유증이 경제 곳곳에 균열을 내고 있다. 세금으로 틀어막는 데도 한계가 있다. 곳간이 비기 시작할 것이란 우려도 커지고 있다. 지지율이 처음으로 60% 밑으로 떨어졌다. 국민의 인내심이 바닥나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최근 규제혁신 행보는 곳간을 채우려는 대통령의 승부수다. 특히 ‘은산분리 완화’는 반전의 묘수가 될 수 있다. 우선 타깃을 잘 골랐다.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전봇대’는 너무 컸고, 박근혜 전 대통령의 ‘손톱 밑 가시’는 너무 작았다. 전봇대는 뜬구름처럼 흩어졌고, 가시는 자잘한 풀뿌리 규제에 막혔다.
 
둘째, 진영 내 반발을 감당하기에도 적당하다. 투자 개방형 병원처럼 결사반대 세력이 없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처럼 금단의 문을 열어젖히는 것도 아니다. 여야는 벌써 8월 국회 처리에 합의했다. 셋째, 전 정권의 정책을 계승한다는 점에서 ‘화합’의 메시지를 줄 수 있다. 인터넷은행은 박근혜 정부의 핵심 정책이었다. 야당(현 여당)의 반대에 막히자 법 개정에 앞서 인가부터 내줄 정도였다. 임종룡 당시 금융위원장은 “은산분리 완화를 기다렸다면 인터넷은행의 출범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돌아봤다.
 
남은 걸림돌은 ‘집토끼’ 지지층의 반발이다. 시민단체는 ‘대선 공약 위반’ ‘경제 민주화 후퇴’라며 성토에 나섰다. 과연 그럴 만한 일인가. 문 대통령이 기대하는 인터넷은행의 ‘메기 효과’는 크게 셋이다. 하나, 소비자 편익 확대. 24시간 거래가 대표적이다. 둘, 수수료 인하. 특히 외화 송금 수수료는 은행의 5분의 1~10분의 1 수준이다. 셋, 핀테크 활성화. 핀테크 기업들의 플랫폼 역할이다. 이런 혁신이 은행을 자극해 더 큰 혁신을 이뤄낸다는 게 메기 효과다. 그런데 잠깐, 의심스럽다. 과연 인터넷은행이 진짜 은행을 벌벌 떨게 할 ‘무서운’ 메기란 말인가.
 
따져 보자. 두 인터넷은행의 고용 유발 효과는 5000명이다. 고객은 약 700만 명, 총대출액은 8조원이다. 반면 4대 은행 중 하나인 KB국민은행 고객은 3094만 명, 대출액은 246조7000억원이다. 국민은행의 스마트폰 뱅킹인 KB스타뱅킹 고객만 1390만 명이다. 두 인터넷은행을 합해 봐야 국민은행 하나에 턱없이 못 미친다. 메기는커녕 피라미 취급이나 안 당하면 감지덕지다.
 
게다가 대통령이 말한 은산분리 완화는 인터넷은행에만 적용한다. 기존 은행에 대한 빗장은 여전히 단단하게 채워져 있다. 그런데도 좌파 기득권은 “문을 열면 집을 뺏긴다”며 반대다. 인터넷은행은 시작에 불과하다. 여기서 막히면 다른 건 언감생심이다. 1% 귀족노조에 계속 휘둘린 채 노동시장 유연화 같은 핵심 개혁은 꿈도 꿀 수 없다. 결과는 불문가지. 일자리는 줄고 경제는 가라앉고 곳간은 빌 것이다. 대통령의 꿈도 접어야 할 것이다. 꿈을 잃은 대통령은 모두의 대통령은커녕 당신들만의 대통령도 될 수 없다. 당신들이 바라는 게 그것인가.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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