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북, ARF 왕따서 주연급으로 … 의장성명에서 CVID 빠졌다

중앙일보 2018.08.07 00:02 종합 8면 지면보기
이용호 북한 외무상(오른쪽)과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지난 4일 오후 싱가포르 엑스포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2018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 인사를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이용호 북한 외무상(오른쪽)과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지난 4일 오후 싱가포르 엑스포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2018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 인사를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대접이 180도 바뀌었다. 지난 4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다. 북한은 그간 ARF에서 소외된 ‘외교 왕따’였지만 올해는 의장국 외교장관으로부터 만찬 접대를 받은 데다 북한이 원했던 ‘비핵화 문구 삭제’에도 성공하며 상전벽해를 경험했다.
 

초안에 들어 있던 문구 삭제 위해
이용호, 의장국과 만찬서 설득한 듯
한국 측 동의, 미국 측 용인도 한몫
북·미 정상회담 뒤 대접 달라져

ARF는 6일 발표한 의장성명에서 북한이 그간 강력 반대해 온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CVID)’라는 표현을 뺐다. 대신 “(ARF 27개 회원국) 모든 장관은 북한이 약속한 대로 완전한 비핵화를 달성하고 추가적인 핵·미사일 실험을 자제하기를 촉구했다”로 바꿨다. 의장성명은 ARF의 결과물 격이다. 지난해 의장성명에는 CVID가 담겨 있었다.
 
올해 ARF 의장성명 초안에도 CVID가 들어가 있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지난 5일 “대다수 나라가 CVID를 말해 그렇게 들어가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에 따라 CVID가 담긴 의장성명이 5일 낮 12시(한국시간 5일 오후 1시)쯤 공개될 예정이었다.  
 
관련기사
 
그런데 의장성명은 6일 이른 오전에야 발표됐고 CVID도 사라졌다. 그사이 벌어진 일이 5일 저녁 이용호 외무상과 ARF 의장국인 비비안 발라크리슈난 싱가포르 외교장관의 만찬이다.  
 
발라크리슈난 장관은 6일 페이스북에 “어젯밤 이 외무상을 만찬으로 모셔 즐거웠다”며 “우리는 지난 6월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때 마지막으로 만났다”고 접촉 사실을 공개했다.  
 
외교 소식통은 “북한이 의장성명에서 CVID를 빼기 위해 막판까지 의장국 장관을 만나 설득하는 총력전을 벌인 것 같다”고 전했다. 물론 CVID 삭제는 한국 측도 원했던 사안이었고, 무엇보다 최근 CVID를 공식 문서에 담는 것을 고집하지 않았던 미국 측이 용인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게 외교가의 해석이다.
 
이 외무상은 그간 ARF에서 외로운 신세였다. 지난해 8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ARF가 열렸을 때 이 외무상은 전통 우방인 중국·러시아 및 의장국이었던 필리핀 3개국하고만 회담할 수 있었다. 외교 소식통은 “당시 필리핀 외교장관은 이 외무상을 만나자마자 그해 7월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시험발사 도발을 문제삼으며 면박을 줬다”고 귀띔했다.  
 
2016년 7월 라오스 ARF 참석을 앞두고는 이 외무상이 동남아 국가 순방을 추진했다가 당사국들이 일제히 거부해 무산됐다. 하지만 올해 이 외무상은 ARF 주연급이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지난 4일 회의장에서 이 외무상에게 다가가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까지 전 세계에 공개됐다. 미 국무부에 따르면 폼페이오 장관은 “조만간 꼭 다시 대화하자”고 했고, 이 외무상은 “동의한다. 우리가 나눠야 할 생산적인 대화가 많이 있다”고 답했다.
 
이 외무상에 대한 참가국들의 대접이 달라진 이유는 단 하나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만나며 북한을 대화 상대로 공인했기 때문이다. 미국과 협상하는 국가로 격상된 북한은 올해 ARF에선 언론을 먼저 찾아다니는 홍보전까지 펼쳤다.  
 
과거 해외 언론에 적대적이었던 태도와 달랐다. 북한 대표단은 4일 이 외무상의 연설 직후 미디어센터를 찾아 기자들에게 연설문을 배포했다. 일본 등 다른 나라 기자가 접근하자 북한 대표단 관계자는 한국 기자를 찾은 뒤 “우리 외무상 동지가 발표한 성명이니 나눠 보시라”며 연설문을 직접 건넸다. 영문·국문본을 모두 갖고 있던 이 관계자는 “조선말(한국어)이 아무래도 편하시죠?”라며 국문본을 우선 주기도 했다.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