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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친서 외교

중앙일보 2018.08.06 00:07 종합 31면 지면보기
김수정 논설위원

김수정 논설위원

북·미 정상 외교에 대(大)봉투가 또 등장했다. 6·12 싱가포르 회담 직전 백악관을 찾은 김영철 북한 통일전선부장은 커다란 흰색 봉투에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친서를 담아 트럼프 대통령에게 건넸다. 지난 4일엔 싱가포르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공식 행사장에서 성 김 주필리핀 미국 대사가 이용호 북한 외무상에게 김 위원장에게 보내는 트럼프의 편지를 전했다. 이 외무상이 회색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하는 모습까지 카메라에 찍혔다.
 
광속도 통신 시대에도 아날로그식 친서는 효용성 높은 외교 방식이다. 진정성 호소에 최고다. 적대국 상대 땐 드라마적 요소도 보태진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친서를 활용했다. 이란과의 핵 합의(트럼프가 파기했지만)도 그가 아야톨라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에게 수차례 보낸 친서가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도 2007년 2·13 핵 합의 뒤 김정일 위원장에게 친서를 보냈다. 북한의 핵 신고 거부로 상황은 종료됐다.
 
“우리는 전쟁이란 매듭에 연결된 줄을 당기지 말아야 합니다. 더 당길수록 그 매듭은 더 강하게 조여져 매듭을 맨 사람이 그걸 풀 수 있는 힘을 잃는 순간이 올 수도 있습니다.” 쿠바 미사일 위기 때인 1962년 10월 26일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케네디 미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일부다. 두 정상은 이 기간 수십 통의 비밀 편지를 주고받았다. ‘핵전쟁을 막기 위한 지도자들의 고충’으로 평가한다.
 
영국의 네빌 체임벌린 총리가 1938년 9월 30일 뮌헨협정 체결을 며칠 앞두고 히틀러에게 쓴 편지의 마지막 줄은 이렇다. “체코 정부는 무력 침입을 우려해 수테텐 지방에서 군대를 철수하지 않으려 하겠지만 내가 설득하겠습니다.” 수테텐을 합병하려는 히틀러의 요구를 들어주고 뮌헨협정을 맺으면 평화를 보장받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역사는 이 편지를 평화전술에 기만당한 유화정책의 실패 사례로 꼽는다.
 
대개의 경우 친서는 수십 년 뒤 공개되고 이때 역사적 평가도 뒤따른다. 하지만 트럼프는 지난달 초 폼페이오 국무장관 편에 김정은이 보낸 두 번째 친서를 “멋진 편지”라며 트윗에 공개했다. 편지에서 김정은은 비핵화 언급 없이 트럼프를 연신 ‘각하(Your Exellency)’라 부르며 2차 정상회담 기대를 표했다. 세 번째 편지는 공개를 염두에 두고 썼을 수 있다. 남북 정상 간에도 친서가 오갔다. 이 모든 친서에 대해 역사는 어떤 판단을 내릴 것인가.
 
김수정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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