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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집사] #22. 보호자가 아이보다 먼저 산소마스크를 쓰는 이유

중앙일보 2018.07.31 16:10
어린 시절, 가족 여행으로 비행기를 처음 탔을 때였다. 이륙 전 비상시 주의사항을 안내하는 비디오를 보는데 의아한 부분이 있었다. 비행 중에 사고가 나면 기내용 산소마스크를 아이보다 어른이 먼저 착용하라는 내용이었다. 영화 ‘타이타닉’에서는 아이 승객들을 최우선으로 구명보트에 태웠다. 왜 산소마스크는 아이에게 먼저 씌워주지 않느냐고 엄마에게 묻자, “어른이 정신을 잃지 않아야 아이를 지킬 수 있기 때문”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보호할 대상이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부터 챙겨야 한다는 얘기였다.
 

[백수진의 어쩌다 집사]
(22) 괜찮아, 잘 하고 있어

어쩌다 한 생명을 돌보고 있다. 결혼도 출산도 점점 늦어지는 요즘 같은 시대에 내 예상보다 한참은 빨리 ‘보호자’가 됐다. 가족이 키우는 반려동물과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는 것과, 어른이 된 이후 한 동물의 반려인을 자처하는 것은 무게가 다르다. 애정의 무게가 아니고 책임의 무게다. 때로 가족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궁극적인 책임은 오롯이 나에게 있다. 가끔 이 책임감이 어깨를 짓누르는 기분을 느끼곤 한다.
 
처음이 가장 힘들었다. 나무와 지금만큼 친하지도 않았고, 고양이의 행동을 읽는 법도 잘 몰랐다. 나무의 의사도 묻지 않고 데려와 놓고 내가 집사 노릇을 잘 하고 있는 것인지 불안했다. 나무를 혼자 두고 출근하는 상황에 대한 죄책감이 가장 컸던 시기이기도 하다.
 
고양이를 아무리 사랑해도 24시간 고양이 생각만 할 수도, 모든 일보다 고양이를 우선으로 둘 수도 없다. 함께 보내는 시간을 더 늘릴 수 없어서, 그나마 함께 보내는 동안은 제대로 놀아주고 있나 싶어서 신경이 쓰인다. 나의 방식이 ‘최선’이 아닐까 봐 초조해진다. 내가 모르고 있는, 나무에게 더 잘 맞는 사료가 있는 건 아닐까. 가격이 비싸서 보고도 모른 체했던 음식이나 물건이 지금 나무에게 꼭 필요한 건 아니었을까. 믿을만한 동물병원을 선택한 걸까. 육묘에 ‘정답’은 없으니 주변의 간섭이나 조언에 휘둘리기도 한다.
 
스스로 중심을 잡지 못하면 쉽게 무너진다. 나무를 향한 미안함이 쌓여가다 와르르 무너져버린 일이 있었다. 나무를 데려오고 한 달쯤 지난 시점. 아직 자동배식기를 구매하기 전이었다. 퇴근 전과 후에 사료를 두 차례 나눠 주고 자율적으로 먹게 했다. 아무리 늦어도 저녁 9시까지는 귀가해서 남은 사료를 챙겨줘야 했다. 그런데 일찌감치 시작한 회식이 예상보다 길어졌다. 8시쯤부터 초조하게 시계만 보다가 9시를 넘기고 나서는 반 패닉이 왔다. 집에 가겠다는 말을 못해서 노래방에서 발만 동동 굴렀다. 자리는 11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어렵게 택시를 잡아타고 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12시가 넘었다. 계단을 오르는 내 발소리를 들은 나무가 닫힌 현관문 안에서 끈질기게 울어댔다.
 
문을 열자마자 나무를 보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얼굴은 택시 안에서부터 눈물범벅이었다. 평소에 돌아오던 시간에 안 와서 미안해. 너를 버려둔 게 아니야. 배고프게 해서 미안해. 누나가 잘 못 했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 집안을 살폈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냉장고 위에 올려뒀던(그땐 나무가 냉장고 위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 몰랐다) 간식 봉지를 끌어내려 먹으려고 한 흔적이 있었다. 그거라도 먹었으면 좋았을 텐데, 비닐 포장을 난도질만 해놨을 뿐 제대로 뜯지도 못했다.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유난스럽다고 해도 좋다. 하지만 정말 유난을 떨 거면 “저는 고양이 밥을 주러 가야 합니다!”하고 회식 자리를 박차고 나왔겠지. 나는 그럴 용기는 없고 걱정만 많은 소심한 초보 집사였다.
 
까드득 까드득. 나무는 내가 급하게 밥그릇에 부어준 사료를 신나게 씹어 먹었다. 사료를 먹고 나서는 언제 배가 고팠냐는 듯 세상 평온한 표정으로 침대에 누워 고롱고롱거렸다. 안심이 되는 동시에 허탈했다. 사실 나는 할 일이 남았거나 배가 고프지 않으면 끼니를 거를 때가 많다. 건강에 좋지는 않지만 죽을 일은 아니다. 나무가 굶은 시간도 평소보다 몇 시간이 길었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별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무가 ‘괜찮다’고 딱 한 마디만 사람 말을 해줬으면 했다.
 
그날 분명히 깨달은 게 있었다. 엉엉 울면서 사료를 챙겨주는 나를 바라보던 나무의 표정은 나만큼이나 불안했다. 평소 같으면 다리에 머리를 비비며 만져주길 기다렸을 텐데, 집사의 돌발 행동에 놀랐는지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화장실 문턱에 고개를 걸치고 납작 엎드려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지켜봤다. 나무가 나의 불안정한 심정을 그대로 느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먼저 산소마스크를 쓰고 숨을 돌려야 하는 건 나였다.
 
문제 해결은 어렵지 않았다. 그날로 자동배식기를 주문했다. 그리고 마인드 컨트롤에 들어갔다. 나무를 처음 데려올 때 사료 선택을 고민하는 나에게 집사 친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네가 줄 수 있는 것 중에 제일 좋은 사료가 나무한테 최고의 사료야.” 비단 사료뿐일까. 모든 게 마찬가지다. 내 능력 밖의 일까지 선택지에 넣다 보면 나는 늘 부족한 집사일 수밖에 없다. 할 수 없는 일은 할 수 없는 일이다. 다만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하면 된다. 미안함과 초조함을 더 크게 느낀다고 해서 나아지는 것도 없다. 집사가 스스로를 먼저 돌봐야 고양이도 더 오래 행복할 수 있을 거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내 고양이는 나와의 생활이 행복할까. 집사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끝없이 노력한다. 인터넷에는 정보가 넘쳐난다. 팁도 많고 말도 많다. 이 정도면 최선인 것 같았는데, 나보다 더 고양이에게 잘하는 집사들이 꼭 있다. 기죽을 필요 없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면, 세상에 나쁜 집사는 없다. 어느날 고양이의 존재가 버겁게 느껴질 땐 자신을 향한 잣대가 너무 까다롭지 않았나 돌아볼 일이다. 내 고양이의 행복에 대한 답은 커뮤니티 게시판에 있지 않다. 그 답은 내 앞에서 무방비하게 드러누워 자는 고양이의 하얀 배에, 더운데도 다가와 몸을 기대는 고양이의 온기에 있다.
 
※ ‘어쩌다 집사’는 다음 화부터 격주로 연재됩니다.
 
글·그림=백수진 기자 peck.soo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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