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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 조카와 삼촌 성관계…'그루밍 성범죄' 늪에 빠졌나

중앙일보 2018.07.25 02:01 종합 16면 지면보기
지난달 21일 대구지법 서부지원은 조카를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A씨(40)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에 따르면 A씨는 2015년 자신의 집에서 조카 B씨(당시 19세)의 고민을 들어주다 그를 강제 추행했다. 이후 강제로 성관계를 맺으려다 미수에 그치자 같은 날 오후 다시 B씨를 성폭행했다. 이후 B씨는 한동안 외삼촌을 피했지만 지난해 3월 할머니 칠순 잔치로 외갓집을 찾았다가 외삼촌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는 것이 검찰의 설명이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검찰 관계자는 “학교에서의 따돌림으로 우울증을 앓았던 피해자는 부모에게 정서적 지지를 받지 못하는 상태였다”며 “이를 외삼촌에게 호소하자 외삼촌이 조카의 취약한 상태를 이용해 호의를 베푼 후 강제로 성관계를 맺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당시 조카는 바지 버클을 움켜잡고 외삼촌을 힘껏 밀어치는 등 강하게 반항했다”고 덧붙였다. 검찰은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A씨는 조카와 “연인 사이였다”고 반박했다. A씨는 "2015년부터 교제 관계에 있었다"며 두 사람의 통화 내역과 선물을 주고받은 내역, 연인들이 사용하는 스마트폰앱의 대화 내용을 증거로 제출했다. A씨의 변호를 맡은 김수호 변호사는 “두 사람은 연인 사이였다는 것이 재판부의 판단”이라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남녀 간 감정은 당사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것”이라며 “도덕적으로 잘못됐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법률적 유·무죄 판단은 다른 영역”이라고 밝혔다.
 
재판부는 “피해자는 피고인에게 알몸 사진을 전송한 사실이 있고 경찰 신고가 이뤄진 뒤 도망가라는 취지의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며 “강간을 당한 피해자의 태도라고 하기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무죄 선고 이유를 밝혔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하지만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해온 전문가들의 생각은 다르다. 장기간에 걸쳐 이뤄지는 친족 간 성폭력의 특성을 감안하면 피해자가 복종 상태에 놓여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배복주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대표는 재판부의 판단에 대해 “친족 간 성폭행의 특수성을 간과한 판결로 보인다”며 “어린 피해자들은 친척 어른에게 경계심을 갖지 않는데, 대부분 가해자는 이를 이용해 호의를 베풀며 마음을 산 뒤 성폭력을 저지른다”고 말했다.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에서 나타나는 ‘그루밍(Grooming‧정신적으로 길들인 뒤 자행하는 성범죄)’ 수법이다. 주로 가정에서 방임되는 취약 아동에게 선물을 주거나 놀이 공원에 데려가며 신뢰를 쌓은 뒤 신체 접촉을 시작해 성범죄에 이르는 식이다. 교사가 진로·고민 상담을 하며 신뢰를 쌓은 뒤 신체 접촉을 시작하거나 친족이 ‘다른 사람도 이렇게 한다’며 성행위를 정당화하고,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관계’라고 세뇌하는 것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 경우 피해자는 스스로 학대 당한다고 인지하지 못할 뿐 아니라 성폭행을 당한 뒤에도 자신이 피해자임을 인정하지 않으며 태연한 척 행동하기도 한다.  
 
지난해 11월에는 자신보다 27살 어린 여중생 C양을 수차례 성폭행하고 임신시킨 혐의를 받던 40대 연예기획사 대표 조모씨가 5번의 재판 끝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 당시 대법원은 “조씨가 다른 사건으로 수감돼 있는 동안 C양이 ‘사랑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계속 보냈다”는 점 등을 이유로 무죄를 선고한 2심을 확정했다. 두려움과 강요 때문에 편지를 작성했다는 A양의 진술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그루밍 가해자는 한 명이 아닌 다수의 피해자를 표적으로 삼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전자 기기를 압수수색하거나 IP주소를 추적해 성매매 전력을 살피고 숨어있는 피해자를 찾는 등 적극적 수사 기법이 필요하다”며 “의제강간(피해자의 동의 여부를 막론하고 강간으로 간주함)의 기준 연령도 13세로 지나치게 낮아 상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홍지유 기자 hong.jiy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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