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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가려면 다 돈인데, 저녁밥 없는 저녁 무슨 소용?"

중앙일보 2018.07.22 05:00
[장원석의 앵그리2030]⑨부장님! 진짜 카톡 안 할 준비 되셨어요? 
 
몇 년 전 독일에서 경험한 일입니다. 로렐라이 언덕을 향해 가는 길이었죠. 막히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20분 넘게 제자리에 서 있었는데 알고 보니 2차선 도로 중 1개 차선을 막고 공사를 하느라 교차 통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운전하던 친구(독일 거주)에게 짜증을 냈습니다.
“교차 통행을 하더라도 1~2분씩 돌려가 하던가?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어이 한국인. 침착하세요. 이 공사 자체가 석 달 째야.”
“없던 길을 새로 내도 한 달이면 충분하겠다.”
“한국 같으면 낮이고, 밤이고 일해서 공사 기간 줄이겠지만 여긴 독일이야.”
근로시간 단축이 시작된 후 첫 근무일일 7월 2일 서울 종로구 KT 광화문빌딩 이스트 로비에 캠페인 문구가 게시돼 있다. <저작권자 ⓒ 1980-2018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근로시간 단축이 시작된 후 첫 근무일일 7월 2일 서울 종로구 KT 광화문빌딩 이스트 로비에 캠페인 문구가 게시돼 있다. <저작권자 ⓒ 1980-2018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성격 급한 거로 치면 세계 어딜 가도 뒤지지 않는 나라, 바로 한국입니다. 한국에 온 외국인이 인사보다 먼저 배우는 말이 ‘빨리빨리’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죠. ‘빨리빨리’가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그 성격 덕에 전 세계에서 가장 ‘빨리’ 경제력을 키웠거든요. 사실 한국인이 일을 빨리만 한 건 아닙니다. 오래, 많이도 했죠. 
 
연간 근로시간이 2000시간을 넘는 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7개 회원국 중 멕시코와 한국, 그리스 정도입니다. 독일(1356시간)과 비교하면 한국(2024시간)이 1년에 약 28일 정도 더 일합니다. 
 
한국이 새롭고, 의미 있는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모두 함께 일하는 시간을 줄이기로 한 겁니다. 7월 1일부터 근로자의 최대 근로시간은 평일·휴일근로를 포함해 주 최대 52시간으로 제한됩니다. 근로시간을 제한을 받지 않는 특례업종도 26개에서 5개로 줄어듭니다.  
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사실 근로시간 단축은 압축성장 과정에서 가슴 속에 숨겼던 열망입니다. 2012년 대선에 나선 손학규 후보가 ‘저녁이 있는 삶’이란 슬로건을 내세웠을 때 열광한 이유죠. 시기상조란 지적, 한국엔 맞지 않는 옷이란 지적이 있지만, 옷이 안 맞으면 몸을 옷에 맞추는 방법도 있습니다. 과한 노동을 줄이고, 일과 삶 사이의 균형을 찾자는 것이니 근로시간 단축의 취지 자체를 부인하긴 어렵습니다.
 
20~30대 직장인들과 대화를 나눠보니 대체로 환영하는 분위기네요. 직장인 손동호(32) 씨는 “당장 힘들어도 가야 할 길인 건 분명하다”며 “야근이 많았는데 딸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지은(34) 씨는 “경영자 마인드 같지만, 솔직히 근무시간 내내 일하는 게 아니지 않으냐”며 “좀 더 압축적으로 일하고 확실히 쉬는 문화가 필요한 때”라고 꼬집었습니다.  
 
걱정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습니다. ‘준비가 덜 됐다’는 지적이 많았습니다. 정채은(29) 씨는 “어디까지가 근로시간이고, 휴식은 언제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며 “서로 눈치만 보는 상황”이라고 말했습니다. 고민재(29) 씨는 “첫 일 주일 동안 저녁 6시 이후에 정확히 다섯 번 팀장과 부장의 카톡을 받았다”며 “향후 일정 등을 점검하라는 건데 그게 일하라는 뜻인 걸 잘 모르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정부는 지난 5월 17일 근로시간 단축 충격을 완화하겠다며 대책을 내놨습니다. 핵심을 요약하면 ‘회사가 알아서 정하라’는 겁니다. 연착륙을 고민해야 할 정부의 대응치곤 좀 안이한 측면이 있습니다. 우려할 만한 부작용은 한둘이 아닙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첫째, 과연 일자리는 늘어날까요? 문재인 대통령은 “근로시간 단축은 고용 없는 성장의 시대에 일자리를 나누는 가장 확실하고 효과적인 대책”이라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근로시간을 줄이면 기업이 고용을 늘릴 것으로 기대합니다. 정부 역시 신규 고용을 하는 기업에 인건비를 지원하는 ‘일자리 함께하기 사업’이나 ‘청년고용장려금 사업’ 등을 확대할 계획입니다.
 

기대대로 될까요? 대한상공회의소가 최근 2200여개 제조업체를 상대로 근로시간 단축 준비 상황을 물었더니 34.9%는 ‘별다른 대응이 없다’고 응답했습니다. ‘신규채용 확대’ 의사를 밝힌 곳은 6%에 불과했죠.  
 
사실 근로시간 단축이 전 사회적인 일자리 나누기로 이어지려면 일단 경기가 뒷받침돼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내수 부진이 시작된 가운데 버티던 수출마저 꺾이고 있습니다. 미중 무역전쟁도 점입가경이죠. 최저임금 인상 등의 여파로 자영업 경기 또한 부진합니다. 
 
한 대기업 인사팀에서 일하는 정재은(34)씨는 “10명을 8명으로 줄일 방안을 찾는 마당에 근로시간 단축으로 일자리가 늘어날 걸로 생각하는 건 너무 낭만적”이라며 “4차 산업혁명 흐름 등을 고려하면 이참에 기계 등으로 사람을 대체할 가능성이 더 크다”고 말했습니다.
 
둘째, 당장 임금이 줄어들 수 있습니다. 한 2차전지 제조업체에서 일하는 김민기(34)씨는 요즘 걱정이 많습니다. 올 하반기부터 잔업과 특근 수당이 줄어들 게 확실해서죠. 이씨는 보통 450만원가량(세후)의 월급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중 잔업·특근수당이 150만원 정도입니다. 김씨는 “근로시간 단축에 따라 150만원 중 약 절반 정도는 못 받게 될 것 같다”며 “월급 대부분이 주택담보대출 상환, 아이의 교육비 등 고정적으로 쓰이기 때문에 타격이 크다”고 말했습니다.  
 
근로시간 적용시기

근로시간 적용시기

기업은 보통 수요에 따라 경영 전략을 바꿉니다. 고속성장기 국내 기업은 주로 고용 조정(근로자 증감)보다는 초과 노동을 통해 공급을 조절했습니다. 직원을 한 번 뽑으면 수급 조절이 쉽지 않으니 기존 근로자에게 일을 더 시키고 수당을 주는 방식을 택한 거죠. 근로자 입장에서도 초과 임금을 확보할 수 있었으니 사실상 ‘윈윈’이었습니다. 이런 암묵적 담합은 일부 근로자만 고임금을 받는 구조를 고착화해 대·중소기업간 양극화를 야기한 원인 중 하나죠.
 

든든한 노조가 있는 곳이야 임금체계를 바꿔서라도 손실을 막겠지만, 중소기업이나 비정규직, 파견직 등은 사실상 보호 장치가 없다는 점에서 걱정이 큽니다. 김씨는 “주말에 아이를 데리고 어디라도 가려면 다 돈이 드는데 시간만 있으면 무슨 소용이냐”며 “'저녁밥 없는 저녁'이 있는 삶이 될까 걱정”이라고 말했습니다.
 
셋째, 법을 바꿨는데 준비가 미흡하다는 건 편법을 동원하기 좋은 상황이란 뜻이기도 합니다. 야근을 당연한 것, 초과 근로는 근로자 본인을 위한 것이란 인식이 팽배한 상황, 기업의 불합리한 노동시간 관리 관행이 만연한 여건 등을 고려하면 걱정할 만합니다. 법 개정 취지 살리려면 처벌을 미룬 이번 6개월 이내에 답을 좀 찾아야 합니다.  
근로시간 단축 시행 첫 근무일인 2일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전자상거래 기업 위메프 본사에서 직원들이 정시 퇴근을 하고 있다. <저작권자 ⓒ 1980-2018 ㈜연합뉴스

근로시간 단축 시행 첫 근무일인 2일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전자상거래 기업 위메프 본사에서 직원들이 정시 퇴근을 하고 있다. <저작권자 ⓒ 1980-2018 ㈜연합뉴스

 
우선 탄력근로제처럼 유연하게 일하는 문화가 확산해야 합니다. 지극히 수직적인 기업 내 근로 문화도 바꿔야겠죠. 김우상(33)씨는 “기업 문화나 일하는 사람의 인식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리 법을 바꿔도 꼼수만 양산할 뿐”이라며 “가장 먼저 변해야 할 건 상사의 ‘생각’”이라고 말했습니다.
 
세종=장원석 기자 jang.wons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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