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흐르는 인생처럼 쉼 없는 질주

중앙선데이 2018.07.21 02:00 593호 27면 지면보기
an die Musik : 이지영의 서공철류 가야금산조 
이지영이 연주한 서공철류 가야금산조. 국악전문음반사 악당이 반은 이지영의 가야금전집 ‘비단나비’(6CD)를 내면서 서공철, 김병호류 산조는 LP로도 냈다.

이지영이 연주한 서공철류 가야금산조. 국악전문음반사 악당이 반은 이지영의 가야금전집 ‘비단나비’(6CD)를 내면서 서공철, 김병호류 산조는 LP로도 냈다.

 700년간 진흙 속에서 잠자던 연꽃 씨앗에서 싹이 나 꽃을 피우는 순간을 지켜본 적이 있다. 경남 함안박물관은 2009년 함안의 고대유적인 성산산성을 발굴하던 중 연못의 깊은 진흙 속에서 연꽃 씨앗을 수습했는데, 연대를 측정한 결과 고려 중후기로 밝혀졌다. 이 씨앗은 놀랍게도 1년 뒤 발아해 꽃을 피웠다. 한껏 부푼 꽃 봉우리는 새벽 햇살이 닿자 몸을 떨며 꽃잎을 하나씩 펼치기 시작했다.  
 
연꽃은 요즘 것과 달랐다. 고려불화에 그려진 연꽃과 색과 모양이 같았다. 그런데 함안 사람들은 고려시대의 모습 그대로 피어난 연꽃을 아라홍련(阿羅紅蓮)이라 이름 붙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터 잡고 사는 땅이 삼국시대에 아라가야 영역이었다는 것을 뚜렷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1500년 전에 소멸한 가야는 그렇게 간혹 희미해진 기억을 일깨운다. 그런데 우리 곁에 가야의 역사를 온몸으로 증명하는 것이 있으니, 가야금이 그것이다. 삼국시대에 가야금과 같거나 비슷한 악기는 신라 등 다른 나라에도 있었다. 그러나 가야의 악성 우륵이 신라로 망명해 국가음악을 관장하면서 그가 연주하던 악기는 영원히 가야금으로 불리게 된다. 21세기의 우리도 신라와 백제 사이에 끼어있던 국가연합체를 까맣게 잊은 채 그 악기를 가야금이라고 한다.  
 
가야금은 열두 줄 현악기다. 울림통 구실을 하는 오동나무 판 위에 명주 현이 가지런히 걸려 있다. 현을 받치고 있는 안족(雁足)은 악보에 그려진 음표를 닮았다. 소리도 아름답지만 품격 있는 악기다. 연주자는 가야금을 오른 무릎 위에 걸쳐 얹고 양 손으로 끌어안듯 뜯고 퉁기고 누르고 흔든다. 연주자와 악기는 한 몸이 되어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들려준다. 고 황병기 선생은 비 내리는 숲, 뻐꾸기 울음소리, 서역(西域)의 먼지바람까지 자유자재로 그려냈다.  
 
황병기 선생이 떠난 자리가 휑하니 쓸쓸했는데, 가야금 연주자 이지영이 아쉬움을 달랜다. 그는 어느 새 가야금계의 대표로 성장했다. 가야금 연주 박사 1호, 서울대 음대 국악과 교수, 김해시립가야금연주단 음악감독이다. 최근에는 6장의 음반을 묶어냈다. 20년간 녹음한 가야금의 장르별 주요음악 전집이다.  
 
그 중 서공철, 김병호류 산조는 LP로도 냈다. 연주가 귀한 서공철류 산조 음반을 먼저 구해 들었는데 마지막 여운이 사라지고도 한동안 감동을 주체하지 못했다. 힘찬 음악, 신들린 연주, 음반의 만듦새도 완벽했다.  
 
가야금 산조는 서양의 건반음악과 비슷하다. 그러나 템포에 큰 차이가 있다. 피아노 소나타는 빠르고 느린 악장이 혼재하고 한 악장 중에도 템포가 유동적이다. 그러나 가야금 산조는 한 시간을 쉬지 않고 연주하는 동안 속도가 계속 빨라진다. 중간에 변칙적 발걸음으로 변화를 주고(엇모리), 한바탕 흥을 돋우기도 하지만(굿거리), 속도를 늦추지는 않는다. 그리곤 어느 순간 툭, 끝난다. 그것은 인생과 같다. 한번 시작하면 결코 멈출 수 없고, 어느 순간 허무하게 사라지는.  
 
서공철류 산조는 악보가 없다고 한다. 구전심수(口傳心授)로 전해진다. 이지영은 오로지 귀에만 의지해 가락을 익혔다. 이런 전수방식은 이수자의 개성과 상상력을 춤추게 해 실제 연주에서는 즉흥성이 두드러진다. 산조의 본래 모습이다.  
 
서공철류는 거칠고 뜨겁다. 황병기류가 고수의 추임새까지 억제해 빠른 장단에서도 정밀하고 이지적인 것과 대조적이다. 같은 가야금 산조인데도 얼음과 불이다. 이지영이 연주하는 휘모리의 질주는 현기증이 난다. 서공철도, 가야금까지도 잊은 것 같다. 고수 이태백의 장구도 두둥, 하늘로 떠오른다. 두 사람은 혼연일체 불꽃처럼 타오르다 한 순간 하얀 재로 흩어진다. ●  
 
글 최정동 기자 choi.jeongdong@joongang.co.kr 

구독신청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