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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남자’, 창작 뮤지컬의 새로운 진화

중앙선데이 2018.07.21 02:00 593호 6면 지면보기
대극장 뮤지컬 신작 가뭄에 창작 뮤지컬 한 편이 시원한 단비를 뿌렸다. 지난 주 막을 올린 ‘웃는 남자’(8월 26일까지 예술의전당, 9월 4일~10월 28일 블루스퀘어)얘기다. ‘엘리자벳’ ‘모차르트!’ ‘레베카’ 등 화려하고 웅장한 유럽 뮤지컬을 라이선스로 소개해온 EMK뮤지컬컴퍼니가 2년 전 선보인 ‘마타하리’에 이은 두 번째 창작물이다.  
 
창작 뮤지컬은 ‘명성황후’ ‘영웅’ 등 민족주의적 감수성에 기댄 1세대를 지나 2014년 충무아트센터가 제작한 ‘프랑켄슈타인’이 본격적인 수출형 대극장 시대를 열었지만, 라이선스 작품과의 차별화라는 측면에서 아쉬움을 남겼다.  
 
사실 ‘웃는 남자’도 독창적인 콘텐트는 아니다. ‘레미제라블’ ‘노트르담 드 파리’라는 세계적인 흥행 뮤지컬의 원작자인 대문호 빅토르 위고가 스스로 “이보다 뛰어난 소설을 쓴 적이 없다”고 했던 동명의 소설이 원작이다. 이미 프랑스와 영국, 러시아에서 뮤지컬로 제작되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세계를 누빌 정도로 성공적인 프로덕션은 나오지 않았기에, 완성도에 따라 노다지가 될 수도 있는 보물 같은 콘텐트인 것이다.    
 
EMK는 화끈한 물량공세로 승부수를 던지며 진일보한 제작 능력을 과시했다. 5년의 제작기간과 175억을 투자해 빚어낸 ‘글로벌 수출 목표 상품’에 걸맞는 장엄한 하드웨어였다. 지난 3월 제작발표회에서 “전세계 풀 라이선스 수출이 목표”라던 엄홍현 프로듀서와 “관객을 울리지 못한다면 나를 총으로 쏘라”던 로버트 요한슨 연출은 자신감의 근거로 원작의 탄탄한 스토리와 프랭크 와일드혼의 음악을 꼽았다. 하지만 정작 뚜껑을 열고보니 가장 차별화된 것은 무대미술이었다.  
 
‘마타하리’에서 이미 스케일의 미학을 과시했던 오필영 디자이너는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무대를 거대한 마술상자로 활용했다. 가시덤불 모양의 무대막에 선명히 새겨진 붉은 입술이 벌어지면 ‘웃는 남자’가 속 이야기를 토해내는 컨셉트다. ‘콤프라치코스’라는 영국의 인신매매단이 귀족들의 잔인한 구경거리로 팔아넘기기 위해 기형적인 모양으로 입을 찢어버린 소년 그윈플렌이 ‘웃는 남자’다.  
 
막이 열리면 초반부터 ‘사람이 CG보다 아름답다’는 걸 알게 된다. 요한슨 연출이 모티브 삼았다고 고백한 2012년작 동명 영화의 스펙터클한 CG 장면들을 아날로그 기술을 활용해 한결 더 환상적으로 구현해냈기 때문이다. 세찬 풍랑이 이는 바다 한복판은 주름진 천과 터널처럼 움직이는 몇 겹의 반원형 프레임으로 표현했다. 눈보라치는 들판은 하얀 천을 뒤집어쓴 무용수들의 안무로 숨막히게 아름답게 펼쳐졌다.
 
‘부자들의 낙원은 가난한 자들의 지옥으로 세워진 것이다’라는 작품의 테마도 이분법적인 무대 미술로 선명히 드러냈다. 스케일보다 돋보인 것은 마법같은 장면전환의 노하우였다. 으리으리한 귀족들의 세계와 초라한 규모의 유랑극단 등 어둡고 파편적인 서민들의 세계를 쉴새없이 오가면서도 이음새를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관객의 시선을 갖고 노는 테크닉이 정교했다.
 
견고한 하드웨어 사이로 서정미도 흘러넘쳤다. 무대 위를 누비는 바이올린 솔로 연주자는 드라마와 무관하지만, 그가 들려주는 메인 테마를 비롯한 구슬픈 선율은 말 못하는 이야기꾼의 무언의 호소처럼 아이러니하게 꽉 찬 무대의 숨통을 틔워줬다. ‘지금 이 순간’을 연상시키는 ‘모두의 세상’ 등 프랭크 와일드혼 특유의 대중적이고 호소력 짙은 음악도 기대한 바였다. 박효신·정성화·정선아 등의 가창력 대결도 뜨거웠다.  
 
별빛 가득한 밤하늘 아래 바다밑으로 가라앉는 비극적 엔딩까지, 무대가 호소하는 건 한 가지였다. ‘이토록 아름다운 무대를 본 적 있는가-’.  
 
없는 것 같지만 의문은 남는다. 미니멀한 디자인으로 무대를 슬림화하는 세계적인 흐름에 정면으로 역행하는 ‘차별화된’ 탐미주의가 과연 시대가 원하는 것인가. 하지만 한국 뮤지컬 프로덕션이 창작진의 예술성을 구현하는 세계 수준의 제작 능력을 입증한 것만큼은 분명하다. 벌써부터 일본 토호주식회사와 라이선스 계약 체결로 내년 동경 공연이 예약됐다니 말이다.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EMK뮤지컬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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