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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정주영 단골 ‘슈즈 닥터’ … 20년 넘게 신을 구두 만든다

중앙선데이 2018.07.21 01:00 593호 25면 지면보기
[박정호의 사람풍경] ‘송림수제화’ 4대째 임명형·승용 부자
송림수제화는 한국 제화업계의 산증인이다. 사진은 100년 전통을 잇고 있는 임명형(사진 위)·승용 부자.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송림수제화는 한국 제화업계의 산증인이다. 사진은 100년 전통을 잇고 있는 임명형(사진 위)·승용 부자.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좁다란 계단에 올라서니 가죽 냄새가 물씬하다. 탁탁탁탁~ 망치질 소리도 경쾌하다. 약 65㎡(19.5평) 크기의 작업실에서 30~50년 경력의 장인들이 구두를 만들고 있다. 소가죽을 자르고, 박음질을 하고, 밑창을 붙이고…. 구두 하나 완성하는 데 천 번의 손길이 간다고 한다. 공방 한 구석에는 고객의 발 모양을 뜬 목형이 가득하다. 서울 을지로3가 송림수제화 풍경이다. 올해로 창립 83년, 4대째 이어온 국내에서 가장 오랜 구둣가게다. 1936년 판잣집에서 시작해 지금은 단출한 4층 건물을 갖추고 있다.
 

창립 83년 구둣가게
등산화·사격화·산악스키화 제작
20세기 한국인 생활사의 축약판

세상에 단 하나뿐인 신발
발 보면 단박에 건강상태 알 수 있어
1㎜ 오차도 견딜 수 없는 사람 많아

‘송림수제화는 바보’ 모토
‘조금 먹겠다’ 할아버지 말 잊지 않아
장인 10명이 하루 평균 12족 생산

주인장 임명형(55)씨는 인터뷰 첫머리에 ‘따로국밥’을 꺼내 들었다. “사람마다 발 크기·모양이 다 달라요. 발등 높이와 각도, 발볼 폭 등등, 모두 제각각이죠. 그것을 일일이 재고, 가죽을 오려 붙이니 따로국밥 아닌가요. 지구촌 75억 인구 중 발이 같은 사람은 한 명도 없어요. 마치 지문과 같죠.”
 
 
4만~5만명 주문서 보관, 스캔 떠놓아
 
그의 ‘구두론’이 계속됐다. “기계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기계는 틀이 짜여 있잖아요. 기성화는 5㎜ 단위로 제작되지만 수제화는 1㎜에도 편하고 불편한 게 갈라집니다. 삶이 달라지는 거죠. ‘제 2의 심장’ 발은 매우 민감합니다. 머리카락 하나 차이도 견디지 못하는 사람도 많아요. 고객이 만족할 때까지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미세하게 잡아줍니다.”
 
그래도 물었다. “신발은 크기만 적당하면 되지 않나요.” 그가 고개를 저었다. “신는 게 아니라 견디는 거죠. 달리 방법이 없으니까요. 보통 10명 중 2~3명은 기성화를 불편해합니다. 1명 정도는 아예 신을 수 없을 만큼 고통을 느끼고요. 깔창 하나만 손봐도 금방 효과가 나타납니다.”
 
임 대표의 별명 ‘슈즈 닥터’가 떠올랐다. “대학·개인 정형외과 의사도 많이 만나 조언을 들었어요. 구두가 편해야 무릎·허리에도 부담이 덜 갑니다. 발에 이상이 있는 고객이 오면 먼저 병원에 들러보라고 권합니다. 10중 8~9는 제 예상이 맞습니다.”
 
1960년대 구두 제작·수선 책자 표지.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1960년대 구두 제작·수선 책자 표지.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어느 정도 하면 그 경지에 갑니까.
“20년쯤 되니까 뭔가 보이더라고요. 손님들의 불편사항을 풀고 풀다 보니 나름 터득하게 된 거죠. 발을 보면 단박에 건강상태를 알 수 있어요. 모두 고객 덕분에 배운 거죠. 그들이 제 스승이요, 선생님입니다.”
 
발을 보면 사람도 알 수 있나요.
“대충 짐작할 수 있죠. 발이 통통하면 성격도 무난하고, 반대로 얇으면 예민한 편이죠. 물론 사견이니 일반화하긴 어렵고요.”(웃음)
 
그간 만난 손님이 얼마나 될까요.
“4만~5만 명은 될 것 같습니다. 주문서를 모두 보관하고 있어요. 컴퓨터로 스캔도 떠놓았습니다. 저만의 데이터베이스이자 재산 1호라고 할 수 있죠.”
 
고객의 발 모양을 딴 구두 목형.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고객의 발 모양을 딴 구두 목형.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송림수제화는 신발 명가다. 창업자 이귀석(1919~96)씨의 뒤를 외조카 임효성(1935~2014)씨가 이었고, 이후 임 대표가 자리를 지켜왔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신발’ 한 우물을 파왔다. 임 대표 장남 승용(26)씨도 4년 전부터 아버지 밑에서 일을 배우고 있고, 병역 복무 중인 차남 승철(23)씨도 오는 9월 제대 후 합류할 예정이다. 공방에서 구두를 배운 윗대와 달리 승용·승철씨 형제는 오산대에서 제화패션학을 전공했다.
 
산악인 허영호씨가 1995년 북극해 횡단 당시 신었던 특수화.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산악인 허영호씨가 1995년 북극해 횡단 당시 신었던 특수화.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송림수제화는 20세기 한국인 생활사의 축약판, 혹은 타임캡슐 같다. 한국 첫 수제 등산화 개발, 산악인 고상돈 안나푸르나 등반화 제작, 대한사격연맹 사격화 공인증 획득, 대한민국 첫 산악스키화 제작, 산악인 허영호 남·북극 횡단 특수화 협찬, 스위스 쉘러 원단 등산화 개발, 서울시 미래유산 선정 등 신발 관련 각종 기록을 새로 써왔다. 시조작가 이은상,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 김영삼 전 대통령, 조순 전 서울시장 등 저명인사의 단골집으로 유명하다.
 
 
장남도 일 배우고 차남도 합류할 예정
 
처음부터 대를 이을 생각이었나요.
“웬걸요, 중고생 때부터 집안 일을 도왔지만 구두에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제대 후 잠시 셔터맨으로 있었는데, 손님들이 아버님을 대하는 태도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죠. 너무들 고마워하는 거예요. 보람이랄까, 사명감이랄까, 구두의 매력에 점차 빠져들었습니다.”
 
‘대장간에 식칼이 없다’고 합니다.
“저희 집은 아닙니다. 스스로 만들어 신어요. 어려서는 고무신·운동화 한 번 신어보는 게 꿈이었습니다. 군대 시절 일화도 있어요. 집에서 등산화 깔창을 가져와 모든 부대원 워커를 수선해줬죠. 덕분에 100㎞ 행군 신기록을 세웠습니다.”(웃음)
 
‘등산화의 메카’로도 불립니다.
“6·25 직후 영국군 군화를 개조해 처음 만들기 시작했어요. 외국 명품 브랜드에 비해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합니다.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1912~2002)옹도 저희 등산화를 신고 북한산에 올랐습니다. 최근 히말라야 트레킹, 산티아고 순례길이 인기인데, 그곳에 다녀온 고객들이 외국인에게도 자랑한다고 해요. 작게나마 국위선양을 한 셈이죠.”
 
가격이 만만치 않던데요.
“등산화는 60만~70만원, 신사·숙녀화는 40만~90만원 정도 합니다. 하나 완성하는 데 2~3주 걸립니다. 하루 평균 12족 정도 만듭니다. 기성화에 비해 비싼 편이지만 한번 사면 20년 넘게 신을 수 있어요. 40년 지난 것도 손질하러 오는 손님도 있습니다. ‘늘 푸른 소나무처럼 평생 신을 구두를 만들자’는 게 선대의 뜻이었어요.”
 
 
여유 생기면 구두박물관 만들고 싶어
 
신사화 진열대.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신사화 진열대.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그리 오래 신을 수 있습니까.
“가죽은 웬만해서 찢기지 않습니다. 비싸다고 아끼는 분들이 있는데, 구두는 막 신어야 합니다. 밑창만 갈아 끼면 되거든요. 신지 않고 오래 두면 가죽이 말라 딱딱해집니다. 또 새 구두일수록 비 오는 날에 신어야 해요. 그래야 발이 젖지 않아요. 구두약만 잘 칠해줘도 두고두고 쓸 수 있습니다. 물론 값이 다는 아니죠. 만원짜리라도 내게 맞으면 최고입니다.”
 
연 매출이 10억원이라 합니다.
“저 포함 장인 10명이 먹고 살 정도죠. 큰돈은 아닙니다. 할아버지가 한창이실 때 주변에서 ‘왜 을지로에 남아 있나, 명동에 나가 더 크게 벌여보라’고 권했다고 해요. 대답이 뭔지 아세요. ‘너희는 많이 먹고 많이 싸라, 나는 조금 먹고 조금 싸겠다’고 하셨대요. 그 말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송림수제화는 바보입니다’가 경영 모토죠.”
 
디자인이 중요한 시대입니다.
“지금까진 디자인보다 기능에 집중했습니다. 신상품을 개발해왔지만 한계가 있어요. 새 제품을 하나 만들려면 4000만~5000만원이 필요합니다. 예전에 대기업에서 황영조 마라톤화를 개발하는 데 1억2000만원이 들었다고 해요. 작은 가게로선 부담이 클 수밖에 없죠. 앞으로 여유가 생기면 구두박물관을 꼭 만들고 싶습니다.”
 
인터뷰 말미 장남 아들 승용씨에게 물었다. 디지털 시대, 굳이 아날로그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했다. “비전이 밝습니다. 제 또래에서 아무도 하지 않으니 제가 40~50대가 되면 독보적인 위치에 오르지 않을까요. 사실 요즘 국내 유명 브랜드는 다 외주를 주고 있습니다. 디자인·기능 등 시야를 넓혀가며 100년 전통을 살려가겠습니다.  이만하면 엄청난 행운아 아닌가요.”
 
구한말 들어온 구두, 당시 한 켤레 값은 쌀 한 가마
고종황제

고종황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이 요즘 화제다. 구한말 격변기를 다룬 만큼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는 근대 한국인의 풍경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지난주 방송에선 애기씨 고애신(김태리 분)이 양혜(洋鞋)를 맞추는 장면이 등장했다. 양혜는 서양구두다. 예부터 가죽신을 만드는 장인을 화혜장(靴鞋匠)이라 했는데 ‘화’는 목이 있는 긴 신발을, ‘혜’는 목이 없는 짧은 신발을 가리킨다.
 
한국에 서양구두는 1894년 갑오경장 이후 들어왔다. 대한제국 고종 황제가 구두를 신은 모습(사진)이 공개되기도 했다. 지난달 서울 국립민속박물관에서 개막한 ‘세대를 넘어-수제화장인’ 특별전(10월 15일까지)에는 지난 세기 한국인과 함께해온 구두의 이모저모를 살펴보는 유물 224점이 나왔다. 대부분 송림수제화에서 빌려온 것이다.
 
우리나라 첫 구두가게는 1898년 설립된 이규익 양화점. 당시 구두 한 켤레 값이 쌀 한 가마와 맞먹었다고 한다. 군 서기 봉급이 12원일 때, 수제화 일등 직공은 48원을 받았다. 구두는 1930년대 대중화했다. 민속박물관 하도겸 학예사는 “지금은 사라진 한국은행 근처 상동제화점을 필두로 소규모 수제화점이 번성했다. 송림수제화 창업주 이귀석씨를 비롯해 이곳에서 배운 사람들이 초창기 우리 제화업계를 이끌었다”며 “수백 년의 가업을 잇는 ‘소상공인의 천국’ 일본에서도 송림수제화처럼 대를 잇는 제화공 가문을 찾기란 쉽지 않다”고 말했다.
 
박정호 문화·스포츠 에디터 jhlogo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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