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구촌 한류 시대, 서구 콤플렉스가 낳은 실학과 결별할 때

중앙선데이 2018.07.21 01:00 593호 27면 지면보기
[실학별곡 - 신화의 종언] ⑩ 에필로그
19세기말~20세기초 서구 콤플렉스에 주눅 들었던 때와 지금은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 한류가 세계를 활보하고 각 분야에서 세계로 비상하는 21세기 우리 젊은 신세대에게 20세기 열등의식의 부산물인 ‘실학 담론’은 더 이상 유효해 보이지 않는다. 사진은 미국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한 BTS. [AP=연합뉴스]

19세기말~20세기초 서구 콤플렉스에 주눅 들었던 때와 지금은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 한류가 세계를 활보하고 각 분야에서 세계로 비상하는 21세기 우리 젊은 신세대에게 20세기 열등의식의 부산물인 ‘실학 담론’은 더 이상 유효해 보이지 않는다. 사진은 미국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한 BTS. [AP=연합뉴스]

‘실학(實學)’은 본래 보통명사였다. ‘실(實)’과 ‘허(虛)’를 대비시키는 오래된 전통 화법중의 하나다. ‘실-허’ 화법은 요즘도 일상에 가끔 쓰인다. 그럴 때마다 실학이란 말이 마음에 걸린다. 그런 경험을 많은 이들이 할 것이다. 보통명사였던 실학이 20세기 들어 고유명사로 탈바꿈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실학이라고 하면 대개 조선후기에 경제와 실용을 중시한 학문이 떠오른다. 자연스럽게 ‘유형원-이익-정약용’ 같은 소위 실학자로 불리는 이들이 연상된다. 실학을 고유명사로 만들어낸 20세기 교육의 효과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사용될 수 있었던 ‘허-실’ 화법이 조선후기의 특정 학파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한정되어 버린 것이다.

20세기에 18세기 실학 개념 만들어
근거 없는 근대성 부여해 역사 왜곡

일제 식민 정책에 이용됐던 실학
해방 이후 한국서 오히려 활성화

BTS 빌보드 1위 … 열등의식 사라져
서구 중심 시각 벗고 극동 재조명

고유명사 ‘근대적 실학’ 아닌
보통명사 ‘실용 학문’ 되돌려야

 
‘실학별곡’은 이별 이야기다. 그동안 익숙했던 실학 개념과의 헤어짐이다. 고유명사를 다시 보통명사로 되돌려주는 일이기도 하다. 왜 헤어져야 하는가. 터무니없는 과장과 은폐 때문이다. 과장은 오해에서 비롯됐다. 실학의 모토 가운데 하나는 실사구시다. 실학 개념 그 자체를 실사구시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무엇이 과장인가. 소위 18세기 실학자들에 대한 평가가 너무 과장돼 있다. 실학은 흔히 주자학의 틀을 벗어나 서구식 근대화를 지향했던 학문으로 알려져 있다. 실상은 그와 많이 다르다. 18세기 실학자라고 규정된 이들의 주장을 면밀히 따져보면 ‘근대 지향’의 철학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신분제도, 토지제도, 상업·시장·화폐 등에 대한 그들의 생각은 근대적이기는커녕 오히려 복고적이었다.(김영식, 『정약용의 문제들』)
 
근대 지향의 실학이라면 적어도 신분제를 해소하거나 폐지하는 방향이어야 할 텐데, 소위 실학자들의 발언에서 인간의 차별 없는 자유와 평등을 지향하는 선구적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천하에 나면서부터 귀한 자는 없다”(天下無生而貴者·『예기』)고 했던 공자 유학의 본령에도 못 미쳤다. 18세기 실학자들이 주자학의 틀을 벗어나 공자 본래의 사상으로 돌아갔다고 하는 주장도 실제 사실과 다른 것이다. 또 중국에서는 이미 송나라 때부터 신분 차별이 크게 완화되기 시작했고, 청나라의 강희·옹정·건륭제를 거치며 1750년대 들어서는 이미 법적으로 노비소유가 금지되기까지 했는데, 이런 변화의 흐름조차도 조선후기의 실학자들은 반영하지 않았다.(황태연, 『한국 근대화의 정치사상』)
 
 
근대화의 진정한 사상 동력 찾는 작업
 
실상이 이러함에도 한국 근대화의 시동을 건 사상이 소위 18세기의 실학으로 알려진 이유는 무엇일까. 근대 지향의 온갖 긍정적 요소를 실학이 독점하면서 나타난 폐해가 적지 않다. 우리 근대사를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오늘 우리의 모습도 제대로 볼 수 없게 한다. 실학을 중심으로 우리 역사를 보면 실학 이전은 거의 야만 상태가 되고, 실학 이후도 그 사상을 받아들여 개화하지 않으면 여전히 미개한 상태로 간주된다. 오로지 실학만이 별처럼 빛나게 되는 것이다. 서구역사가 규정해놓은 근대성이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20세기 우리 민족의 지상목표가 근대화였고 지금 우리가 그 성과를 누리고 있는데, 선조들이 추진해온 근대화의 진정한 사상 동력이 무엇이었는지 제대로 살펴보자는 것이다.
 
18세기 실학자로 알려진 이들이 의식적으로 ‘근대적 실학’을 추진한 것은 아니었다. 학파를 형성한 것도 아니었다. 그들에게 근대성을 부여하며 실학파로 만들어낸 것은 후대인 20세기 초반의 일이다. 18세기의 실학은 20세기에 역으로 재구성된 것이었다. 여기에 바로 실학의 은폐가 있고, 그것은 바로 우리 근대사의 왜곡된 실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무엇이 은폐인가. 그 비밀의 코드를 풀기 위해선 우리 기억의 회로를 역순으로 돌리는 작업이 필요하다. 18세기부터 20세기로 내려오는 순서로 실학의 의미를 파악해선 안 된다는 얘기다. 애초에 그런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20세기부터 18세기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실학의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20세기 초반에 실학이란 말이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비밀의 열쇠라고 할 수 있겠다.
 
지금까지 대개의 실학 연구가 주로 얼마나 근대 지향적인가를 입증하거나 보여주는 식이었다면, 그런 본말이 전도된 방식은 이제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20세기에 ‘실학 담론’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분석하는 작업이야말로 21세기 한국학이 풀어야 할 과제다. 실학 담론은 18세기의 역사가 아니라 20세기의 역사라는 얘기다.(노관범, 『기억의 역전』)
 
19세기 말~20세기 초 대한제국 시기의 일간 신문과 잡지에 실학이란 말이 많이 쓰였는데 그것은 서양의 문물과 신식 학문을 가리켰다. 이때 실학은 문명·개화의 동의어였다. ‘서양 실학’이 들어오는 창구는 일본이었다. 일본만 실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전통 속에도 그런 ‘서양 실학=근대화’를 지향하는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바로 조선후기 실학이었다. 그것은 우월의식이 아니라 열등의식이었다. 실학으로 개화도 하고 민족사의 자부심도 세워보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실학 개념 그 자체의 함정까지 모두 헤아려보지는 못했다. 일제는 실학만 전파한 것이 아니었다. 그 포장을 뜯으면 침략 야욕이 숨어 있었다. 많은 이들이 그 발톱을 간과했다.
 
실학과 침략은 동전의 양면이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일제의 침략 노선은 패전으로 파국을 맞았다. 그러나 실학은 그렇지 않았다. 해방 이후 오히려 더 활성화되었다. 근대화는 여전히 시대적 과제였기 때문이다.
 
 
해방 후도 한국과 일본서 ‘실학의 신화’ 계속
 
20세기 최대의 문제적 인물 가운데 한 명인 육당 최남선에게서 그 흐름의 연장선이 발견된다.  20세기 초 실학 담론의 기초를 놓은 인물이 최남선이었다. 해방 이후에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우리가 새 역사를 만드는 단계에서 가장 깊고 중요한 근본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현재 우리 국민이 세계 열국의 사이에서 가지고 있는 후진성을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 그것은 우리의 고질이 되어 있는 부문주의(浮文主義·형식만 그럴듯하고 실속이 없음)를 탈각하고 오로지 실학·실증·실험의 방식으로 생활기준을 전향함에 있다. 이것은 곧 이른바 근대 정신이요, 민족 번영의 기본 원리요, 역사 창조의 원동력인 것이다.”
 
1955년 7월호 잡지 ‘새벽’에 실린 최남선의 글인데, 제목이 ‘실학 경시에서 온 한민족의 후진성’이다. 1908년 3년 넘게 일본 유학을 하고 돌아온 최남선은 잡지 ‘소년’을 창간했다. 일본의 근대 계몽사상가로 알려진 후키자와 유키치의 글을 자신이 번역해 ‘소년’에 싣기도 했다. 실학이 근대 정신이고 민족 번영의 원리라고 하는 그의 변함없어 보이는 소신이 눈길을 끈다.
 
실학의 신화는 계속되고 있다. 1960년대 이후엔 ‘자본주의 맹아론’(내재적 발전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실학이 더욱 중시되었다. 자본주의 맹아론은 마르크시즘에 기반해 식민사관을 극복하기 위한 이론이었다. 하지만 이 역시 실학 개념 그 자체의 함정을 간과했다는 점에서 근원적으로 식민지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 시기에 다른 한편으로 박정희 정부의 국정 지표인 ‘조국 근대화’를 뒷받침한 논리도 실학이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1978년 완간한 『한국사 』의 제14권은 이 같은 작업을 일단락 짓는 것으로, ‘근대적 사상의 맹아’라는 제목 아래 조선후기 실학을 설명하고 있다.
 
일본에서도 비슷하다. 명치유신의 ‘침략적 실학’을 이론화한 후쿠자와 유키치와 그의 사상이 마루야마 마사오 전 동경대 교수에 의해 부활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1989년 5월 26일 동경에서 마루야마를 만난 김용옥 전 고려대 교수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서양은 어찌되었든 통체적 연속성을 가진 위대한 문명입니다. 동양은 아직도 서양문명의 성취를 철저히 흡수 할 필요가 있어요.”(김용옥 해제, 『일본정치사상사연구』)
 
마루야마는 또 “우리가 서구라파 계몽주의가 제시한 인간관의 요체를 제대로 흡수하려면 아직도 장구한 세월이 걸릴 것”이라고 예견하기도 했다. 마루야마의 이 발언은 이미 30년 전 일이다. 지금은 최남선이나 마루야마처럼 ‘서양 콤플렉스’에 주눅 들어 살던 시대가 아니다. 한류가 세계 무대를 휩쓸고 BTS가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르는 현실은 예사로 보아 넘길 사건이 아니다. 이와 함께 동서 문명교류에 관한 새로운 연구 흐름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마루야마가 탄복해 마지않던 서구 계몽주의의 원류가 알고 보니 극동의 공맹사상과 관료제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영미 학계의 연구가 속속 이어지고 있다. 서양이 동양을 비하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반 아편전쟁 이후의 일이다.
 
19~20세기 서양 콤플렉스의 부산물인 실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반성, 그리고 폭력적 근대화에 대한 성찰을 거친 21세기에 더 이상 실학을 고유명사로 남겨 놓을 이유가 없어 보인다.
 
배영대 문화선임기자 balance@joongang.co.kr

◆자문 전문가=한영우·오금성·김영식 서울대 명예교수, 김용옥 전 고려대 교수, 황태연 동국대 교수, 장득진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이정철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참고자료
황태연, 『한국 근대화의 정치사상』, 청계, 2018.
노관범, 『기억의 역전』, 소명출판, 2016.
김영식, 『정약용의 문제들』, 혜안, 2014.
이태진·김백철 엮음, 『조선후기 탕평정치의 재조명』, 상·하권, 태학사, 2011.
한영우·고동환 외, 『다시, 실학이란 무엇인가』, 푸른역사, 2007.
고야스 노부쿠니,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의 개략’을 정밀하게 읽는다』, 역사비평사, 2007.
J J 클라크, 『동양은 어떻게 서양을 계몽했는가』, 우물이있는집, 2004.
김용옥, 『독기학설(讀氣學說)』, 통나무, 1990.

관련기사
 
 

구독신청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