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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공론조사는 ‘맥가이버 칼’이 아니다

중앙일보 2018.07.19 01:50 종합 28면 지면보기
양영유 논설위원

양영유 논설위원

전국적으로 ‘공론조사(Deliberative Polling)’가 유행이다. 신원전 5·6호기에 이어 대입제도 개편, 제주 영리병원, 광주광역시 도시철도 2호선 등 중앙·지방 정부 가리지 않는다. 고르디우스의 매듭마저 단박에 끊어버릴 기세의 ‘만능 맥가이버 칼’로 여기는 듯하다. 숙의민주주의 틀 안에서 시민에게 사회적 갈등과 이해가 첨예한 이슈를 설명하고, 깊이 있는 논의를 거친 뒤 합리적 의견을 도출해 내는 건 건강한 일이다. 리더의 독단으로 인한 행정 실책 방지 효과도 있을 터다.
 

원전·대입·영리병원·도시철도 등 각종 공론화 유행
‘숙의민주주의’ 장점 불구 책임면피용 남용 경계해야

그러나 공론조사는 만능이 아니다. 잘 쓰면 약이 되지만 잘못 쓰면 독이 된다. 환자 증상에 따라 맞춤 처방을 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공론조사 창시자인 미국 스탠퍼드대 제임스 피시킨 교수도 “정보·균형·다양성·양심성·동등한 관점의 5대 원칙이 보장돼야 숙의민주주의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고 했다.
 
국내 공론조사는 어떨까. 전문가들에게 물어보니 원칙이 흔들리고 있어 경고가 필요하다고 했다. 경고 대상은 크게 네 가지. 첫째는 이미 결론 내려진(predetermined) 정책의 합리화 도구로 쓰는 경우, 둘째는 공론 주제와 상관없는 시민을 기계적으로 참여단에 넣은 경우, 셋째는 국가 신인도를 고려하지 않은 경우, 넷째는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영역에 적용하는 경우다.
 
신원전 공론조사는 첫 번째 경고를 받을 만하다. ‘공사 재개’ 도출은 절묘했지만, 정부 의도대로 원전 축소 권고가 나왔다는 지적이 있다. 그 결과 산업 경쟁력 약화 등 여러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원자력학회가 “국가 에너지 정책에 대한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며 성명을 낸 이유다. 현재 중 3이 치를 2022학년도 대입 개편안은 두 번째 경고 대상이다. 교육부는 지난 1년간 개편안을 놓고 온갖 토론회를 진행하며 법석을 떨었다. 그렇지만 수능 절대·상대 평가, 수시·정시 비율 등에 대한 대립은 여전하다. 경우의 수가 워낙 많으니 그럴 수밖에. 그런 짐을 떠안은 시민참여단 550명은 며칠 전 1차 숙의 토론을 벌였다. 대입은 원래 당사자이거나 학부모가 아니면 관심이 급격히 사그라지는 특성이 있다. 그런데 만 19세 이상이 참여단 선발 기준이었다. 그러다 보니 20대 96명, 30대 94명, 40대 111명, 50대 109명, 60대 이상 140명이 들어갔다. 연령별 인구구조를 기계적으로 적용한 탓이다. 입시 ‘모르모트’가 된 학생들이 빠지고, 관심이 가장 적은 60대 이상이 가장 많은 모순이 생겼다.
 
세 번째 경고를 받을 만한 사안도 있다. 국내 첫 투자개방형 병원인 제주 녹지국제병원 공론화다. 정부가 사업을 승인해 중국 기업이 병원을 짓고 직원까지 채용했는데 최종 허가권자인 원희룡 지사가 개원 여부를 공론 결정에 떠넘겼다. 지방선거 앞에선 ‘신의 한 수’였을지 모르지만, 외자 유치 신인도 측면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정부가 의료 영리화 정책 중단을 선언해 조사가 공정할지도 의문이다. 허용진 공론조사위원장도 “답답하다”고 했다.
 
광주시 도시철도 건설 방식 공론조사는 네 번째 경고 대상이 될 수 있다. 지하로 짓든, 지상(트램)으로 짓든 인프라의 핵심 결정 요인은 비용 편익과 안전성이다.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공학 영역인 것이다. 과연 일반 시민이 관여할 일일까.
 
반면 정작 공론이 필요한 것 같은데 논의조차 안 된 경우도 있다. 논란이 뜨거운 최저임금과 주 52시간 근무제, 세제개편 같은 빅이슈가 그렇다. 앞의 네 가지 사안보다 훨씬 더 국민 피부에 와 닿는 이슈 아닌가.
 
공론조사 유행은 당분간 계속될 것 같다. 과잉은 절대 금물이다. 공론조사를 시민 뜻을 받드는 착한 행정이나 만능 칼로 둔갑시켜서도 안 된다. 국가·사회적으로 꼭 필요한 이슈를 엄선해야 한다. 리더의 결정 장애를 덮거나, 책임면피용으로 남용하거나, 사회적 비용만 늘리는 대상은 차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공론(公論)이 공론(空論)될 수 있다.
 
양영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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