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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톱판에서 인의예지신을 만나다

중앙일보 2018.07.16 07:01
[더,오래] 김성희의 어쩌다 꼰대(53)
이 고스톱이란 게 묘하다. 갖가지 룰이 더해져 '도박'과 달리 게임 속에 드라마가 있고, 미처 몰랐던 인간 내면을 엿볼 수 있어 흥미롭다. [중앙포토]

이 고스톱이란 게 묘하다. 갖가지 룰이 더해져 '도박'과 달리 게임 속에 드라마가 있고, 미처 몰랐던 인간 내면을 엿볼 수 있어 흥미롭다. [중앙포토]

 
가끔 고스톱을 친다. 국민 오락이라는 화투 노름 이야기다. 물론 노름 수준은 아니다. 한 달에 한 번, 예전 선후배들과 밥값 내기를 하는 정도다. 따로 특별한 취미 활동이 있는 것도 아니고, 체질상 술은 거의라 할 만큼 못하기에 퇴직 후에는 이런 자리가 아니라면 부담 없이 예전 동료들과 어울릴 기회가 없다. 그러니 고스톱 모임이 은근히 기다려지기도 하고, 어쩌다 거를 때면 아내가 왜 빠지느냐고 부추길 정도로 내게는 제법 소중한 모임이다.
 
이 고스톱이란 게 묘하다. 갖가지 룰이 더해져 ‘도박’과 달리 게임 속에 드라마가 있고, 미처 몰랐던 인간 내면을 엿볼 수 있어 흥미롭다. 술자리에서 인간성이 드러나기에 어느 기업에선 신입사원 면접 때 술자리를 마련하기도 한다는데 나더러 말하라면 고스톱도 그런 용도로 쓰일 만하다. 왜 있잖은가. “위기 다음에 기회”라는 둥 해가며 야구를 흔히 인생의 축소판이라 하지만 고스톱 역시 인생의 축도라 할 수 있어서다.
 
당연히 고스톱 모임에서도 유교에서 말하는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도리, 즉 오상(五常)’을 거론할 수 있다.
 
우선 인(仁)이다. 우리 모임엔 개평이란 게 없다. 잃으면 잃은 대로, 따면 딴 대로 끝이다. “우리가 이러는 걸 영상으로 기록했다가 70, 80이 되어 보면 정말 재미있을 것”이라며 낄낄댈 만큼 우리 모임은 오래, 쭉 계속될 테니 길게 보면 승자도 패자도 없다고 믿는 데서 나온 불문율이다. 그렇지만 피해를 보면 속이 쓰린 게 인지상정이다. 그럴 때 약간의 돈을 패자의 주머니에 슬그머니 찔러주는 이는 어진 사람이다. 복 받으라.


패 나빠도 무광 선언한 사람 위해 참전
고스톱에서도 유교에서 말하는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도리, 오상(五常)'을 거론할 수 있다. [중앙포토]

고스톱에서도 유교에서 말하는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도리, 오상(五常)'을 거론할 수 있다. [중앙포토]

 
다음은 의(義)다. 보통 다섯 명이 모이는데,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러면 매 판 두 사람은 게임에서 빠져야 한다. 보통은 자기 패를 보고 참전 여부를 결정하는데 이때 순서상 빠질 사람이 미리 ‘무광’을 외칠 때가 있다. 자기 패가 나쁘니 게임에 빠지게 해달라는 일종의 항복 선언이다. 이때 자기 패가 좋지 않아도 그 친구의 우는 소리를 받아들여 게임에 대신 참전하는 이는 의로운 사람이다.
 
예(禮)도 있다. 고스톱을 하다 보면 준비해간 돈이 떨어질 때가 있다. 판돈이 크지 않고 실력이 어금버금하니 좀처럼 그런 경우는 없지만 아무튼 그런 경우도 있긴 하다. 그럴 때 다른 이에게 변통해서라도 자기 책임을 다하는 이, 바로 예를 지키는 경우 바른 사람이다.
 
어쨌건 머리싸움을 하는 게임이니 당연히 지(智)가 필요하다. 자기 패를 잘 헤아려 참전 여부를 슬기롭게 결정하는 것은 기본적인 지이고, 피해를 줄이기 위해 혼자 피해를 보는 ‘독박’을 자청하는 것이나 기울어가는 승부를 다음 판으로 연기하기 위해 마지막 패 2장으로 ‘쇼단’을 붙이는 것 모두 지혜 없인 어려운 결단이다.
 
고스톱판에선 피해는 과장하고 수익은 축소하는 게 다반사여서 자기 혼자 거울을 보고 고스톱을 쳐도 최종 계산이 맞지 않는다고 할 정도다. 이처럼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고스톱판에서 자신의 손익을 투명하게 가감 없이 밝히는 사람은 믿어도 좋은 사람이다. 곧 신(信)을 갖춘 경우다. 물론 오덕(五德)과 동떨어진 불인(不仁), 불의(不義)하고 무례, 무지, 무신한 이도 있지만 이는 다음으로 미루련다.
 
그나저나 성원(成員)이 됐음에도 굳이 내가 끼지 않으면 모임을 하지 않겠다고 참석을 강권하는 친구들은 내가 오덕을 갖춘 군자라서 그러는 걸까, 내 지갑은 ‘째진 지갑’이어서 내 돈은 먼저 보는 사람이 임자라 여겨서일까. 나는 다른 건 몰라도 지(智)가 부족한 것만은 틀림없다.
 
김성희 북 칼럼니스트 jaejae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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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희 김성희 북 칼럼니스트 필진

[김성희의 천일서화] 책생책사(冊生冊死). 책을 읽고 기자를 꿈꿨고, 출판팀장으로 기자 생활을 마무리했다. 닥치는 대로 읽었지만 핵심은 ‘재미’였다. 공연히 무게 잡는 책은 싫기도 하고 읽어낼 깜냥도 못 되었으니. 이 경험을 바탕으로 ‘재미있는 책’ 이야기 또는 재미있는 ‘책 이야기’를 쓰려 한다. 실타래가 풀려나가는 듯한 아라비안나이트식 책 이야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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