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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한국 제조업 사활 이제 7년 남았다

중앙일보 2018.07.12 01:18 종합 28면 지면보기
정경민 디지털사업국장

정경민 디지털사업국장

“이제 7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중국제조 2025’ 계획, 한국엔 재앙
반도체 이후 먹거리에 사활 걸어야

1993년 2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로스앤젤레스(LA)에서 절규에 가까운 질책을 쏟아냈다. LA는 그가 수백 명의 중역을 이끌고 6개월간 전 세계 선진기업을 시찰하러 나선 대장정의 첫 방문지였다. 우연히 찾아간 대형마트에서 그는 충격을 받았다. 진열대 앞줄은 일본 소니와 NEC 제품이 차지했다. 삼성 제품은 먼지만 뽀얗게 뒤집어쓴 채 뒷구석에 처박혀있었다. 세기말 대전환기에 삼성이 변하지 못하면 끝장이구나. 절체절명의 위기감은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낳았다. 이를 계기로 삼성은 한국의 골목대장에서 소니는 물론이고 애플·인텔도 넘어선 글로벌 제조기업으로 거듭났다.
 
“우주선도 발사하는 중국이 아직 볼펜심도 못 만드나.”
 
2015년 12월 리커창(李克强) 중국 총리는 한탄했다. 중국은 한 해 400억개의 볼펜을 생산해 세계시장의 80%를 석권했다. 그러나 볼펜심의 볼은 못 만들었다. 크롬이나 스테인리스강으로 된 볼 제조는 일본·스위스 등만 가진 첨단기술이었기 때문이다. 볼펜심은 덩치만 컸지 핵심 기술은 없는 ‘허당’ 중국 제조업을 상징했다.
 
볼펜심의 위기감은 그해 ‘중국제조 2025’를 낳았다. 앞으로 30년 동안 3단계에 걸쳐 중국의 제조업을 양에서 질로 환골탈태시키겠다는 원대한 구상이다. 1단계로 2025년까지 제조 ‘대국’인 중국을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독일·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제조 ‘강국’ 반열에 올려놓겠다는 거다. 중국 건국 100주년이 되는 2049년엔 미국도 추월한다는 게 시진핑(習近平)의 야심이다.
 
미국에게 중국제조 2025는 악몽일 수밖에 없다. 미국은 지금도 중국과의 무역에서 한해 4000억 달러 가까운 적자를 보고 있다. 그런데 중국 제조업이 미국과 맞먹는다면 경제전쟁은 해보나 마나다. 미국 우선주의를 모토로 내건 트럼프 정부로선 북한 핵무기에 버금가는 위협일 수밖에 없다. 340억 달러 규모의 중국 수입품에 트럼프 정부가 날린 관세 폭탄이 중국제조 2025를 정조준한 까닭이다. 미국과 중국이 벌이고 있는 난타전은 단순한 무역전쟁이 아니라 미래 제조업의 사활을 건 패권다툼이란 얘기다.
 
중국제조 2025는 중국에 중간재를 팔아 먹고사는 한국 제조업에도 재앙이다. 중국이 제조 강국이 된다면 한국 제조업은 설 자리가 거의 없어진다. 더욱이 중국은 공산당 일당독재 국가다. 정부가 마음먹으면 물불 안 가린다.
 
올 1~5월 세계 전기차 배터리 시장에서 중국 CATL은 일본 파나소닉을 제치고 1위로 올라섰다. 지난해 같은 기간 CATL의 출하량은 파나소닉의 4분의 1에 불과했다. 그런데 불과 1년 만에 출하량이 4배 이상 늘며 세계 1위를 꿰찼다. 그 뒤에는 중국 정부가 있다. 중국 정부는 2016년부터 한국산 배터리를 장착한 전기차에는 보조금을 주지 않고 있다. 보조금이 차값의 절반이니 아무리 한국산 배터리의 품질이 좋다 한들 중국산과의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중국이 반도체에서 한국을 따라잡는 것도 시간문제다.
 
한국 제조업으로선 진퇴양난이다. 미국이 관세 폭탄으로 중국제조 2025를 지연시켜준다면 미래 수명은 연장될 수 있다. 그러나 당장의 무역전쟁으로 인한 수출 타격은 불가피하다. 반대로 미·중이 극적으로 협상을 타결 짓는다면 당장은 숨통이 트인다. 하지만 미래는 불확실해진다. 한국 제조업이 미·중이란 두 고래의 싸움에 운명을 맡겨야 하는 새우 신세가 됐다.
 
새우가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걸 피할 길은 하나뿐이다. 지금의 반도체를 이을 미래 제조업 먹거리를 만들어내는 거다. 중국은 엄두도 못 내고 미국도 부러워할 절대 경쟁력을 갖지 못하면 중국제조 2025란 쓰나미에 휩쓸릴 수밖에 없다. 93년 이건희 회장이 LA에서 절규한 것처럼 2025년까지 한국 제조업에 남은 시간은 이제 딱 7년뿐이다.
 
정경민 디지털사업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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