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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페미의 시대]여성 6만 명은 왜 혜화역서 '자이팅'을 외쳤나

중앙일보 2018.07.08 15:51
7일 오후 무대 위에서 한 여자가 오랫동안 길러온 머리를 삭발했다. 그가 말했다. "지금까지 여성이기에 받은 크고 작은 차별들이 있었습니다. 남들이 정해놓은 틀 속에 박힌 채로 더는 살아가지 않겠습니다." 무대 아래 수만 명의 여성들은 그를 향해 "상여자!""자이팅!"(자매+화이팅)이라고 소리쳤다.

 
7일 오후 서울 종로구 혜화역 인근에서 여성들이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7일 오후 서울 종로구 혜화역 인근에서 여성들이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7일 혜화역 집회에 6만 명 참석, 경찰 "전례 없어"
 
이날 다음 카페 '불편한 용기'가 주최한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 혜화역 시위에는 주최 측 추산 6만 명, 경찰 추산 1만9000여 명의 여성이 참가했다. 공식 통계는 없지만 여성이라는 단일 성별로 이렇게 많은 인원이 모인 건 처음이다. 경찰 고위 관계자는 "여성들만 참여하는 집회도 흔치 않지만, 이 정도 인원이 모인 것은 전례가 없다"고 말했다. 참가자들은 분노를 상징하는 빨간색 옷을 입고 서로를 '성님'이라 부르며 "자이루!"(자매+하이루)라고 인사했다.
 
주최 측은 참가 여성을 대신해 "우리는 일상적으로 불법 촬영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 대상화되는 것에 대한 부담감, 피해자가 됐을 때 정당한 보호를 받지 못할 것이란 무력감에 시달려 왔다"고 밝혔다. 앞선 1·2차 시위 때처럼 '생물학적 여성' 외에는 집회 출입이 제한됐다. 경찰과 시위 현장 스태프들은 집회 장소 주변을 순찰하며 사진을 찍으려는 남성들을 제지했다.
 
7일 오후 서울 대학로에서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가 열리고 있다. 이들은 소위 '몰카'로 불리는 불법촬영 범죄의 피해자가 여성일 때에도 신속한 수사와 처벌을 할 것을 촉구했다. [뉴스1]

7일 오후 서울 대학로에서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가 열리고 있다. 이들은 소위 '몰카'로 불리는 불법촬영 범죄의 피해자가 여성일 때에도 신속한 수사와 처벌을 할 것을 촉구했다. [뉴스1]

 
같은 날 광화문 광장에서도 16개 여성단체로 구성된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의 낙태죄 폐지 집회가 열렸다. 5000여 명의 참가자들은 "독박처벌 독박책임 낙태죄가 웬 말이냐" 등의 구호를 외치며 낙태죄 위헌 소송을 심리 중인 헌법재판소 방면으로 행진했다. 그렇게 서울 시내의 대표 번화가 두 곳에서 여성들의 목소리가 잇따라 울려 퍼졌다.
 
7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여성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집회를 열고 낙태죄 폐지를 촉구하며 행진하고 있다. [뉴스1]

7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여성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집회를 열고 낙태죄 폐지를 촉구하며 행진하고 있다. [뉴스1]

 
이들의 연대는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충분했다. 특히 혜화역 시위의 주최 측인 다음 카페 '불편한 용기' 운영진 100여 명은 서로 이름도, 나이도 몰랐다. 그저 불법촬영, 일명 '몰카' 문제의 심각성과 성차별 사회 구조에 분노한 불특정 다수의 여성이 온라인을 기반으로 하나둘 모인 것이었다. 집회 때마다 주최 측이 경찰에 신고한 예상 참가인원보다 훨씬 많은 여성이 혜화역에 집결했다. 경찰 측은 "보통 집회 신고를 하면 신고 인원보다 실제 집회 인원이 훨씬 적은 게 대부분인데 혜화역 시위는 더 많았다"라고 설명했다. 
 
주최 측 "그동안 쌓인 분노가 참여로 이어져"
 
불편한 용기 운영진은 중앙일보와의 e메일 인터뷰에서 "일상적으로 접하는 여러 공공장소에서 한국 여성들은 한 번쯤 몰래카메라가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해본 적이 있을 것이고, 인적이 드문 길을 걸을 땐 '112'를 누른 상태로 후다닥 지나간 경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 피해를 '너무 예민한'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성장해 왔는데 그렇게 쌓인 분노가 시위 참가자 수로 나타난 것 같다"고 밝혔다. 이어 "여성들은 이제 각자에게 '불편할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건 같은 여성인 서로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됐다"고 덧붙였다. 이들은 다음달 4일 광화문에서 4차 집회를 계획하고 있다.
 
최근 한국 사회의 최대 화두로 떠오른 이 '뉴(new) 페미니스트'(뉴페미)들은 한 단어로 정의하기 어렵다. 주로 온라인 커뮤니티나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자매애'로 뭉치는 이들을 누군가는 '넷페미'라고도 부른다. 주축은 20대~30대 여성이고 최근엔 10대 여성들의 움직임도 눈에 띈다. 페미니즘을 비난하는 자들과는 거리낌 없이 '키배'(키보드 배틀)를 뜨고 자매의 도움이 필요한 곳엔 아낌없이 '화력'을 보탠다. 탈코르셋 운동, 토플리스 시위 등 고정된 '여성'의 모습을 거부하는 움직임도 보인다.
 
최근 여성들이 트위터나 인스타그램 등 자신의 SNS에 올리고 있는 탈코르셋 인증글들. [인터넷 캡처]

최근 여성들이 트위터나 인스타그램 등 자신의 SNS에 올리고 있는 탈코르셋 인증글들. [인터넷 캡처]

‘불꽃페미액션’ 활동가들이 지난 2일 오후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있는 페이스북 코리아 사옥 앞에서 성차별적 규정에 맞서는 상의 탈의 퍼포먼스를 벌였다. [뉴스1]

‘불꽃페미액션’ 활동가들이 지난 2일 오후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있는 페이스북 코리아 사옥 앞에서 성차별적 규정에 맞서는 상의 탈의 퍼포먼스를 벌였다. [뉴스1]

 
여성 혐오 표현을 단어만 바꿔 역공하기도
 
넷페미들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건 3년 전쯤부터다. 일베(일간베스트)가 한참 커나가고 여성혐오 표현들이 온라인에 난무하던 시기였다. 당시 사회적으로 가장 큰 사건이 메르스 사태였다. 첫 번째 감염 환자가 남자라는 보도가 나오자 디시인사이드 메르스 갤러리에서는 "한 사건에 여성이 등장할 때마다 여성 전체를 싸잡아 조롱하던 남자들의 언어를 비틀어 보자"며 '미러링' 방식의 언어를 처음 시도했다. 미러링은 상대방의 잘못, 특히 여성 혐오적인 말이나 글, 행동 등을 화자의 성별만 바꿔 반대로 뒤집어 보여주는 방식이다. 

 
여자가 조신해야 한다고? "남자가 조신해야지" 


"이래서 남자는 밖에 다니면 안 돼""남자가 조신해야지" 등 미러링 언어는 평소 여성이 흔히 듣던 말에서 성별만 바꿔본 일종의 반격이었다. 이 미러링을 무기로 2015년 개설된 사이트가 '메갈리아'였다. 이후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은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5·17 페미사이드(여성살해)'라 불리며 여성혐오 이슈에 불을 지폈고 넷페미들의 목소리를 오프라인으로 확장했다. 
 
'한남충'(한국남자+벌레) '재기해'(성재기 남성연대 대표의 죽음을 비하한 표현)' 등 뉴페미들의 미러링이 다소 과하다는 지적도 있다. 실제로 지난 혜화역 시위에서 참가자들은 "경찰도 한남충" 등 미러링 표현들을 거리낌 없이 사용했다. 
 
그러나 불편한 용기 운영진은 "미러링이 거울처럼 비추던 본래의 혐오 표현들이 사라진다면 미러링 표현들도 자연스럽게 퇴색될 것"이라며 "페미니즘은 여성이 겪고 있는 성차별 구조에 대한 저항이지, 남성 개인에 대한 공격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저항' 이후의 방향성 놓고는 논쟁 중
 
페미니스트들은 지금도 끊임없이 페미니즘의 방향과 방법론을 두고 논쟁하고 있다. 트렌스젠더 여성들을 어떻게 볼 것인지, 미러링 이후의 대안은 없는지, 난민 문제는 어떻게 봐야 하는지 등 다양한 화두를 고민한다. 대학에서 여성학을 전공한 회사원 김모(24)씨는 "가끔 페미니스트들을 싸잡아 비난하는 이야기들을 듣곤 하는데, 페미니즘 안에서도 굉장히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다"고 표현한다. 그렇게 n명의 페미니스트들은 지금도 n개의 페미니즘을 만들고 있다. 
 
홍상지·여성국·성지원 기자 hongs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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