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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위수령의 종언

중앙일보 2018.07.06 01:22 종합 31면 지면보기
김남중 논설위원

김남중 논설위원

박정희 정권 유신체제의 시작과 끝은 공교롭게도 위수령(衛戍令)과 함께였다. 군인들이 치안 유지 명분으로 캠퍼스와 시가지에 주둔하면서 시위 학생·시민을 진압했다. 1971년 10월과 79년 10월의 위수령이다.
 
71년은 교련 철폐 운동에서 촉발된 대학생 민주화 시위가 격화되던 시기다. 위수령 발동 첫날인 10월 15일 무장 군인들이 고려대에 진입했다. 저항하는 학생들에게 최루탄과 폭력이 가해졌다. 23일 군인들이 철수할 때까지 23개 대학에서 177명이 제적되고 100여 명이 ‘아스피린(ASP, Anti-Student Power)’, 즉 반정부 학생 세력이란 딱지가 붙은 채 강제 징집됐다. 문제는 이때 학생운동 세력이 초토화됐다는 것이다. 이듬해 유신 쿠데타에 학생들이 무기력했던 이유다. 위수령이 유신체제 정지작업이었던 셈이다.
 
79년 10월 ‘부마항쟁’은 유신체제의 종말을 알린 사건이다. 박 정권은 이때도 마산에 공수부대를 투입해 시위대를 진압했다. 절차마저 무시한 ‘불법 위수령’이었다. 며칠 뒤 ‘10·26’으로 정권이 무너졌다.
 
위수령은 그 이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일촉즉발의 순간이 있었다. 87년 6·10항쟁 때다. 넥타이 부대까지 시위에 가담하자 위수령이 발동될 것이라는 풍문이 돌았다. 2010년 공개된 ‘작전명령 제87-4호’ 문건을 보면 실제로 군 출동 준비령이 하달됐다. 군 내부에서조차 광주의 비극을 넘어서는 내전을 우려할 판이었다. 막판에 군 동원 계획이 철회된다. 당시 특전사령관의 반대와 미국의 압력, 광주의 기억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란 분석이다. 위수령 불발은 ‘6·29선언’으로 이어졌다.
 
30년 뒤 위수령의 그림자를 다시 불러낸 건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다. 지난 3월 군인권센터가 촛불집회 당시 국방부가 위수령을 검토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면서다. 국방부가 작성한 ‘위수령에 대한 이해’란 문건도 공개됐다. 문재인 정부 국방부가 해명하고 나서야 논란이 가라앉았다. 사문화되다시피 한 위수령(대통령령 제17945호)이 온존한 탓에 불거진 문제다.
 
이런 위수령이 제정된 지 68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국방부는 그제 위수령 폐지안을 입법예고했다. “위헌 소지가 있다”는 주장을 수용한 결과다. 국회 동의 없이 병력을 동원하고 무기 사용 가능성까지 열어둔 이 법령은 군사정권 시절 민주화운동을 옥죄는 도구였을 뿐이다. 이런 괴물이 아직 남아 있었다는 게 기막힐 노릇이다. 위수령 아류가 더 없는지 돌아볼 일이다.
 
김남중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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