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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미투' 고발자들, "혼자가 여럿 돼 버틸 수 있었어"

중앙일보 2018.07.04 06:00
"제가 교수님을 자극하나요? 이렇게 짧은 바지를 입으면 저를 만지고 싶나요? 정말 추행을 당한 게 제 잘못인가요?"
 
지난 1일 국민대 의상디자인학과 졸업생 이민지(가명)씨는 지난 5월 학교에서 열린 의상디자인학과 J교수 징계위원회에 참석해 이같이 말했다고 전했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는 듯 이씨의 목소리를 격앙돼있었다. 이씨는 "용기를 내 징계위원회에 J교수에게서 피해를 당한 이후 못 입던 짧은 바지를 입고 나갔다"고 말했다.    
2일 국민대 조형대 J교수 연구실 문 앞에 붙었던 메모. [국민대 재학생 제공]

2일 국민대 조형대 J교수 연구실 문 앞에 붙었던 메모. [국민대 재학생 제공]

 
누군가 그 자리에서 이씨의 잘못이 아니라는 말을 하자 이씨는 "제 잘못이 아닌데 왜 제 삶이 무너지고 학교생활을 포기해야 하나요"라고 쏟아냈다고 한다. 2010년 8월 J교수가 이씨의 엉덩이를 움켜쥔 날, 그해 9월 교수가 연구실 문을 잠그려고 하자 도망쳤던 날을 다시 기억에서 꺼내야 했다.
 
이씨는 지난 2월 국민대 성평등 상담실 홈페이지에 J교수에게 당한 성추행 피해를 고발했다. 학교 측은 지난 29일, 고발이 나온 지 4개월 만에 J교수를 해임했다. J교수는 육ㆍ해ㆍ공군과 해병대 디지털 전투복 패턴을 디자인한 업계 권위자다. "내가 당했을 때 침묵하고 외면해서 다음 피해자가 나온 것 같았어요. 더는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올해 초 '미투' 고발이 이어질 때 이씨가 나선 이유다.  
 
피해자·지인 등 20명 연락해 설득, 재학생들과도 '공조' 
J교수는 2000년대 초반부터 여학생들 겨드랑이를 상습적으로 꼬집었다. 이씨는 J교수가 여학생 가슴골 안에 디자인 재료를 넣었다가 꺼낸 것도 목격했다. 이씨는 주변에 피해를 당하거나 피해자를 아는 이들 20여 명에게 연락을 돌렸어요. 이들을 설득한 끝에 졸업생 5명가량이 피해 사실을 학교에 진술했다.  
 
국민대 재학생들이 J교수 징계를 요구하는 대자보. [중앙포토]

국민대 재학생들이 J교수 징계를 요구하는 대자보. [중앙포토]

재학생들과의 '공조'도 시작했다. 국민대 ‘펭귄프로젝트’ 모임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재학생들을 찾았다. 여전히 J교수의 행동은 계속되고 있었다. 조형대 재학생들은 국민대 조형대 성윤리비상대책위원회(이하 비대위)를 꾸렸다. 피해 사례를 모았다. J교수 징계를 위한 서명을 받고 대자보를 붙였다. 대자보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누군가 떼어냈지만 끝까지 붙였다.
 
어려움도 있었다. "징계시효 관련 법 개정 전 학교와 면담하는 자리에서 남성 교직원이 '저도 처벌하고 싶은데 시간이 지났고 정도가 심하지 않다'는 말을 했어요. 시선도 불편했고요. 같이 간 후배들에게 미안했고, 내겐 너무 큰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태도에 충격을 받았어요."
 
그날 이씨는 희망의 전화에 자살상담을 받았다. 왜 '미투'를 했는지 후회했다. 당시 상담을 통해 한국여성상담센터를 소개받았다. 진상조사단에 참여하거나 학교 측과 연락을 하기 전후로, 1주일에 한 번은 상담센터를 찾아 버틸 힘을 얻었다. 끝까지 싸워야 했다. 곁에는 자신을 돕는 재학생과 다른 피해졸업생들이 있었다.  
 
파면 이후 "분노 줄었지만, 상처는 영원해" 
국민대 총학생회가 21일 오후 국민대 본부관 앞에서 '제자 성폭력' 사실이 폭로된 조형대학 의상디자인학과 J교수의 파면을 촉구하고 있다. [중앙포토]

국민대 총학생회가 21일 오후 국민대 본부관 앞에서 '제자 성폭력' 사실이 폭로된 조형대학 의상디자인학과 J교수의 파면을 촉구하고 있다. [중앙포토]

학교는 징계위를 거친 뒤 이사회를 통해 J교수에 대한 해임을 의결했다. 학생들은 해임 의결에 반발했다. 정년을 1년 앞둔 J교수 해임은 처벌 효과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씨도 실망이 컸다. 피해 직후 주변에서 "업계가 좁은데 구설수에 올라 좋을 게 있냐"며 만류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비대위는 반대 성명을 냈다. 이후 총학생회도 나서 기자회견을 연 끝에 J교수 파면 결정을 이끌어냈다. 이씨는 파면이 결정된 날 내내 울었다. "이전까지는 죽어가는 느낌이었는데 다시 뭔가 살아있는 기분이 그일 이후 처음으로 들었어요. 성평등 센터에 진술해준 피해 선배들도 '아 이제 조금은 살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무엇보다 노력해준 후배들, 재학생들에게 너무나 고마웠어요."
 
이전에는 군복만 봐도 가슴이 뛰고 피해 기억이 떠올랐다는 이씨는 이제는 군복을 봐도 도망치고 싶지 않다고 했다. "J교수가 파면된 이후 분노는 줄었지만 받은 상처는 절대 사라지지 않더라고요. 싸워내도 상처는 영원해요. 파면 결정을 얻어내 끝난 것 같지만 멈춰있던 제 삶은 이제 겨우 다시 시작이에요. 미래에 대한 고민도 이제야 시작했는 걸요."
 
혼자가 아닌 함께 싸워 J교수의 파면 결정을 이끌어낸 이씨는 끝이 아닌 시작을 이야기했다.  
 
여성국 기자 yu.sungk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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