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본문

 
논산 부부가 죽음으로 지목한 가해자 왜 또 무죄 받았을까
 
“친구 아내인 나까지 탐하려고 모사를 꾸민 살인자.”
“죽어서라도 끝까지 복수할 테니 기다리고 있어라.”  
 
3월, 전북 무주의 한 캠핑장에서 30대 젊은 부부가 유서를 남기고 숨을 거뒀습니다. 두 사람이 남긴 13장짜리 편지엔 미안하단 얘기가 많습니다. 새 학기가 시작됐을 두 딸에겐 “미안하다. 어떤 형태로든 늘 곁에서 지켜줄게”라고, 부모님과 장모님께는 “불효를 저지르는 아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캠핑장 주인에게까지 “젊은 부부가 오죽하면 이랬을까 너그러이 용서 바랍니다”고 썼습니다. 논산에 살던 이씨 부부였습니다. 
   
3월 이씨 부부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 남긴 유서. 당시 '논산 부부 자살 사건'으로 보도됐다. [사진 유족, JTBC 캡쳐]

3월 이씨 부부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 남긴 유서. 당시 '논산 부부 자살 사건'으로 보도됐다. [사진 유족, JTBC 캡쳐]

 
이씨 부부가 ‘살인자’ ‘복수하겠다’며 지목한 것은 남편의 30년지기 친구인 박모(37)씨였습니다. 박씨는 친구 아내인 이모(33)씨를 강간한 혐의로 기소됐는데 1심에서 무죄를 받았습니다. 부부가 함께 극단적인 선택을 한 건, 2심 첫 재판이 열린 지 3일 만이었습니다. 아내 이씨는 “제 마지막 글이 피고인 박OO에게 어떤 방법으로든 전달되길 간절히 바랍니다”고 썼습니다.  
 
지난달 4일, 박씨는 2심에서 또다시 무죄를 선고받습니다. 대전고법 형사1부는 박씨가 이씨를 한 차례 폭행한 적이 있긴 하지만(폭행죄 유죄), 폭행일로부터 나흘 뒤 벌어진 일은 CCTV화면 등을 근거로 이씨와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른 성관계'라고 봤습니다(강간죄 무죄). 1심과 같은 결론입니다. 다만 박씨는 이씨 사건 말고 조직폭력단체 후배들을 때리거나 다치게 한 혐의로도 재판을 받았는데, 박씨의 형량은 대부분 이런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죽은 자를 두 번 죽였다." "법은 가해자 편." "CCTV화면은 보이고 자살한 얼굴에서는 어떤 표정이 보이는가." 당시 기사엔 허탈해하는 댓글들이 달렸습니다. 근래 보도된 판결 기사 중 이렇게 많은 이들이 사법부 불신을 드러낸 것도 드뭅니다.    
 
이 사건은 부부가 유서를 남기고 숨졌을 때 이미 널리 알려졌습니다. 이런 지탄이 쏟아질 것을 모를 리 없는 2심 재판부마저 무죄를 선고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판결문을 따라 "지난 일 년간 밤마다 우리 두 사람은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는 이씨 부부가 숨지기 1년 전으로 돌아가 봅니다.
 
2017년 4월 10일은 이씨의 남편이 해외로 출장을 가 있던 때였습니다. 박씨는 갑자기 이씨에게 전화를 해 만나자고 하더니 "나를 좋아한 적 없느냐" 묻습니다. 이씨가 아니라고 하자 박씨는 "네 남편에게 숨겨놓은 아들이 있다""네 남편을 해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다"며 이씨의 뺨과 머리를 때립니다. 아는 경찰에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걸어 "지금 낫을 들고 있는데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도 했습니다. 
 
폭행 일러스트. [중앙포토]

폭행 일러스트. [중앙포토]

  
여기까지는 1·2심이 모두 '폭행'으로 인정한 사건입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박씨는 이날을 계기로 이씨와 남녀관계로 발전했다고 주장하고, 이씨는 이날부터 협박이 이어졌다고 주장합니다. "논산엔 내 편 뿐이고 말을 듣지 않으면 남편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딸들과 잘 지내고 싶으면 알아서 잘해라" "사람을 붙여 위치를 알아내겠다"는 말을 들었다는 겁니다.
 
박씨를 재판에 넘긴 대전지방검찰청 논산지청의 김남순 지청장은 "이씨가 일관되게 피해를 주장하고 있는 점, 두 사람이 이전에 따로 만난 적 없는 사이임에도 폭행 이후 짧은 시일 안에 사건이 벌어진 점 등에 비춰 합의하의 성관계로 보기 어렵다고 보고 기소했다"고 말합니다. 
 
[JTBC 캡쳐]

[JTBC 캡쳐]

 
하지만 증거가 없었습니다. 이씨는 박씨로부터 온 협박 문자를 지웠습니다. 수사단계에서 포렌식도 했지만 복구가 안됐습니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카카오톡·통화 등 모든 증거를 남겨 당신(박씨) 부인에게 보내줄 걸 땅을 치고 후회한다." 이씨가 유서에 남긴 말입니다.
 
있는 증거는 두 사람의 말, 그리고 사건 당일인 2017년 4월 15일 모텔에 들어가고 나오는 CCTV화면 뿐입니다. 이씨는 한 차례 거부했지만 맥주만 마시자고 해 모텔로 갔다고 주장했습니다. 
 
1심 재판부는 "협박에 못 이겨 모텔에 끌려가게 됐을 때 강간 위험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을 텐데 이를 피하기 위해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면서 "맥주가 든 비닐봉지를 들고 모텔에 들어가는 모습, 모텔에서 나와 다시 차에 타는 모습은 강간 피해자의 모습이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자연스럽다"고 판결문에 썼습니다. 2심 재판부도 "겁을 먹어 보이지 않는다" "강간을 당했다거나 두려워하는 사정이 확인되지 않는다"고 봤습니다.    
 
박씨가 이씨의 내밀한 가정사를 알고 있는 점, '템포'라는 삽입형 생리대의 상호명을 알고 있는 점도 '자유로운 성관계'의 근거가 됐습니다. 박씨는 "남편의 비밀에 충격받은 이씨가 가정에서의 어려움을 토로했고 이를 위로해주며 매일 만나다시피 했다"고 주장했고, 이씨는 "박씨가 추궁하듯 물어봐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습니다. 박씨는 경찰에서 "이씨가 먼저 스스로 템포를 제거하겠다며 화장실에 갔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씨는 검찰에서 "(템포가 아닌) 부착형 생리대를 붙이고 있었는데 박씨가 강제로 벗겼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2심에서는 이런 쟁점들에 대해 이씨의 얘기를 더 들어보려던 참이었습니다. 1심에선 인정되지 않았지만, 사건 당일 이전부터 지속적인 협박이 있었다면 이씨가 "자연스럽고 겁 않게" 행동해야 하는 건 당연합니다. 여성용품에 대한 이씨의 보다 구체적인 증언도 필요했습니다. 박씨의 반대가 있었지만, 2심 재판부는 검찰이 신청한 이씨 증인신문을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이씨는 증인신문을 1주일여 앞두고 다시는 증언대에 설 수 없는 길을 택했습니다. 피해자 변호인이었던 최진영 변호사는 "재판부에서도 모호한 부분이 있어 피해자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고 본 것"이라면서 "직접증거는 피해자 진술밖에 없는 상황이다 보니 증인신문을 통해 판결이 바뀔 가능성이 높았다"며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래도 두 사람이나 박씨를 지목하는 유서를 쓰며 목숨까지 끊었는데 왜 달라진 것이 없을까요. 자살과 함께 남겨진 말들은 자살의 극단성 때문에 대개 견주기 어려운 충격을 주지만, 법적으로는 산 사람이 법정에서 한 말 만큼의 힘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검찰은 이씨 부부의 유서를 항소심 재판부에 증거자료로 제출했지만, 재판부는 참고자료로만 받아줬습니다.  
 
이완구 전 국무총리와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는 '성완종 리스트' 사건으로 재판에 넘겨졌지만 대법원에서 무죄를 확정받았다. [연합뉴스]

이완구 전 국무총리와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는 '성완종 리스트' 사건으로 재판에 넘겨졌지만 대법원에서 무죄를 확정받았다. [연합뉴스]

 
3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 사건을 기억하시나요. 경남기업 회장이 자살 직전 자신에게서 뇌물을 받아갔다는 정치인들의 이름과 액수를 적었고 '데스노트' 처럼 적힌 이름들은 뇌물죄로 재판에 넘겨집니다. 
 
사망한 성 전 회장이 남긴 녹음파일과 녹취서가 증거가 될 수 있느냐는 유·무죄를 가른 핵심 판단이 됐습니다. 이완구 전 총리 사건 1심은 "(성 전 회장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거짓말을 남긴다는 건 생각하기 어렵다"고 봤지만, 2심은 "(성 전 회장이 이 전 총리에게) 배신과 분노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며 그가 남긴 말들을 증거로 신뢰할 수 없다고 봤습니다. 
 
사망한 사람이 생전에 남긴 말이나 글이 무조건 증거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달리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에 인정되기가 좀 더 어렵습니다. 형사소송법 314조는 '참고인이 숨지는 등 법정에서 직접 진술할 수 없는 경우 특신상태(特信狀態)가 인정되면 예외적으로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있다'고 하고 있는데, '특별히 신뢰할 수 있는 상태' 판단은 재판부의 몫입니다.
 
성폭력 사건을 많이 맡아온 한 지방법원 부장판사는 "성범죄 사건에서는 진술의 일관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1심 판결과 2심 판결이 달라지는 경우는 드물다. 1심에서 경찰·검찰 단계와 법정에서 진술한 내용을 토대로 판단했기 때문이다"고 설명합니다. 
 
성폭행 일러스트. [중앙포토]

성폭행 일러스트. [중앙포토]

 
이씨는 유서에 "지옥 끝까지 끌어내릴 것이다" "내 가족이 받은 상처를 갚아주겠다"며 박씨에 대한 원망을 쓰긴 했지만, 수사와 재판과정에서 했던 진술을 바꾸는 내용은 없었습니다. 최 변호사도 "유서는 사실관계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 억울함을 호소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증거로서의 가치를 갖기는 어렵다"면서 "법원에서도 피해자에게 억울한 일이 있었다는 건 인식을 하고 있었으나 심리가 더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1심과 같은 결론을 낸 것으로 보인다"고 말합니다.
 
또 이씨의 유서에는 "세 사람을 용서하지 않겠다""돈에 눈이 멀어 내 남편 뒤에서 칼을 꽂고" 등, 박씨의 강간죄 혐의와 관련되지 않은 사람과 사연들이 있어 보입니다. 부부의 이야기를 들은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이씨 부부가) 2심 재판에 증인으로 나왔더라면 더 다퉈볼 수도 있었을 텐데 안타깝다"고 말했습니다. 이 사건은 20일부터 대법원 1부에 배당돼 심리 중입니다.
 
문현경 기자 moon.hk@joongang.co.kr 
 
※‘판다’는 ‘판결 다시보기’의 줄임말입니다. 중앙일보 법조팀에서 이슈가 된 판결을 깊이 있게 분석하는 코너입니다.     
 
공유하기
Innovation Lab
Branded Content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