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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사람을 더 외롭게 만들지

중앙선데이 2018.06.30 02:00 590호 30면 지면보기
영화 ‘오 루시!’
느닷없이 나타난 일본 영화 ‘오 루시!’는 몇 가지 이유에서 보는 이들을 깜짝 놀라게 만든다. 일단 평범해 보이는 40대 중년 여성 세츠코(테라지마  시노부)가 갑작스럽게 사랑에 빠지게 되는 원어민 영어 선생 존 역으로 할리우드 매력남 조쉬 하트넷이 나온다는 것이다. 처음엔 그냥 잠깐 나오는 줄 알았다. 그런데 영화 끝까지 나온다. 그게, 이상하게도, 좋다.  
 
영화가 달콤한 로맨틱 코미디인 척 인생의 쓴맛, 그 보편성을 담고 있음에도 데뷔 감독 히라야나기 아츠코의 작품이라는 점, 그것도 30대 젊은 연출가의 작품이라는 점이 눈에 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일종의 러브 스토리로 포장돼 있음에도 입소문은 40~50대 이후의 장년층 사이에서 더 많이 날 작품이라는 느낌이 든다. 인생의 어두운 면을 좀 아는 사람들이라면 이 영화 ‘오 루시!’의 느낌 하나하나가 칼날이 되어 심장 바로 밑으로 깊이 파고 들것이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이 영화는 오프닝 장면을 충격적일 만큼 잘 찍었다. 대부분 마스크를 쓰고(일본 사람들은 요즘 남녀를 불문하고 하나같이 마스크를 쓰고 다닌다) 질서정연하게 출근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일본인들의 전형적인 모습 그대로)을 철로 건너편에서 찍은 장면이 첫 풀 쇼트다. 마치 알란 파커가 ‘핑크 플로이드의 벽’(1982)에서 교복을 입고 줄을 서서 소시지 공장 컨베이어 벨트 위로 올라서는 아이들의 모습을 그려낸 것처럼, 그 파시즘의 전조(前兆)를 기억나게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충격적인 죽음. 뒤에 서있던 남자가 세츠코의 가슴, 한쪽 유방을 가볍게 움켜진 뒤 이렇게 말한다. “잘 있어.” 그리고 뛰어 든다. 바싹 타버릴 만큼 건조한 가슴으로 살아가는 현대인들 가운데 저 남자처럼 자살의 유혹에 시달리지 않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오 루시!’는 제목만 발랄한 척, 영화 시작부터 고독이라는 괴물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그 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흠칫 떨고 있는 현대인들의 부서진 영혼에 대해 얘기하려 한다. 그 우울증으로 인한 소리 없는 절규는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하는 남자’를 연상케 한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어려운 텍스트로 돼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야기는 쉽고 명료하게 이어진다. 세츠코는 조카의 권유 아닌 권유로 영어를 배우러 갔다가 루시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영어 학원이 아니라 롤 플레이(role play) 전문 룸살롱인 것처럼 변태적인 분위기인 이 학원에서 원어민 영어 선생 존은 그녀에게 탁구공을 입에 물리고(마치 이상 성행위를 위해 쓰여지는 기구 마냥) “영어를 잘하려면 입을 크게 벌려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말하라고 한다. “날 따라 해요. 하아~이~.”  
 
세츠코는 존에게 ‘hi’라고 반복해서 얘기하는 과정을 통해 단박에 그에게 흠뻑 빠지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그녀는 세츠코에서 루시로 순간 이동을 한다. 하지만 존은 곧 사라져 버린다. 세츠코=루시는 미국 LA까지 그를, 아니 그녀를 속이고 존과 도망간 조카 미카를 찾아 나선다.  
 
심플한 듯, 진부한 듯 보이는 이 로드 무비 아닌 로드 무비는 사람의 마음을 조금씩 조금씩 침잠시킨다. 영화를 보다 보면 여기 나오는 모든 등장 인물들 때문에 마음이 아파 견딜 수가 없다. 사랑은 사람을 더욱 더 외롭게 만든다. 대신 그 과정을 통해 삶을 포기하게 하기보다는 새롭게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선사한다. 신의 뜻은(신이 과연 있다고 한다면) 어쩌면 역설에 있다. 한 가지의 깨달음을 위해 한 가지를 처절하게 잃게 만든다. 사랑은 중요하지만 그것도 삶의 연속선 상에 있는 것일 뿐이다. 사랑은 위대하지만 그것 한 가지만으로는 달성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사랑은 각성의 마취제이며 내가 나 아닌 또 다른 자아의 여러 가지 분열을 목도하고, 인정하고, 받아 들일 때 만이 그 효과를 발휘할 수가 있는 것이다.  
 
1972년생인 테라지마 시노부의 열연이 돋보인다. 그의 또 다른 작품으로는 ‘바이브레이터’(2003) ‘사랑의 유형지’(2007) 캐터필러(2010)‘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2012) 등이 있다. 캐터필러로는 2010년 베를린 영화제 여우 주연상을 수상했다. 명실공히 개성파 연기자라는 얘기다. 야쿠쇼 코우지와 미나미 카호를 만날 수 있는 것도 이 영화의 덤 아닌 덤이다. 근자에 보기 드문 일본의 수작(秀作)이다. 히라야나기 아츠코 감독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가와세 나오미의 뒤를 잇는 일본 뉴웨이브의 신성(新星)이 될 것이다. ●  
 
글 오동진 영화평론가  사진 (주)엣나인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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