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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커 “10년” vs 올브라이트 “30개월” … 북 비핵화 시간 차이 왜

중앙선데이 2018.06.30 01:00 590호 29면 지면보기
오영환의 외교노트
2010년 11월 12일 북한 영변의 핵 시설 단지. 미국 스탠퍼드대 지그프리드 헤커 교수 일행이 북한 초청으로 참관에 나섰다. 헤커 교수는 미 핵무기 개발의 산실인 로스 알라모스 국립연구소 소장을 11년간 지낸 굴지의 핵물리학자다. 당시 그의 방북은 일곱 번째였고, 영변 쪽은 네 번째였다. 북한은 헤커를 통해 핵 개발 계획의 메시지를 던져왔다. 2004년 1월엔 플루토늄 금속(200g)을 처음 공개했다. 조지 W 부시 미 행정부의 대북 강압정책에 맞서 김계관 당시 외무성 부상 표현대로 “핵 억제력”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헤커 교수 비핵화 3단계 로드맵
동결 1년. 감축 2~5년, 폐기 6~10년
핵무기 조립한 사람이 해체해야
불확실성 커 신속 비핵화 힘들어

올브라이트 소장 단기 핵 폐기론
북한 전면 협조 하면 2~3년 이내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까지 폐기

 
 
북 고농축 우라늄 원심분리기 4000개 추정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북한은 다시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헤커 일행을 푸른색 지붕의 새 빌딩으로 안내했다. 그 전까지 5㎿e 원자로 장착용 핵연료봉 제조 건물이었다. 길이가 120m나 됐다. 2층으로 안내받은 헤커는 소스라치게 놀랐다(flabbergasted)고 했다(올 1월 CBS 인터뷰). 직경 20㎝에 높이 1.82m짜리의 고강도 알루미늄 원심분리기 2000개가 여섯 줄로 연결돼 있었다. 원심분리기는 핵무기 원료인 고농축 우라늄(HEU)을 생산하는 장치다. 2000개의 원심분리기는 해마다 40㎏의 HEU를 생산할 수 있다. 핵무기 약 2개 분량이다. 북한 안내인은 헤커에게 원심분리기는 HEU가 아니라 실험용 경수로 연료인 저농축 우라늄을 생산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시설 통제실은 초현대식이었다. 곳곳에 LED(유기발광다이오드) 디스플레이가 장착돼 있었다. 2002년 10월 북한의 HEU 계획 시인으로 2차 북핵 위기가 불거지자, 태도를 180도 바꿔 일관되게 부인해온 북한의 우라늄 농축 커밍아웃이었다.
 
북한의 HEU 시설 공개는 이 의혹을 추궁해온 미국의 초기 정보 판단이 옳았다는 점을 입증한다. 그러나 미국은 무수한 정보의 점(點)을 선(線)으로 잇지 못했고, 북한의 공개로 선에 접근할 수 있었다. 미국의 첨단 정찰위성은 푸른색 지붕의 비밀을 풀지 못했다.
 
헤커는 “우리의 정보기관들이 얼마나 형편없는지(bad)를 보여주는 사례”라며 “이는 또한 북한이 얼마나 쉽게 원심분리기 시설을 건설하고, 숨길 수 있는지를 알려준다”고 말했다. 제임스 클래퍼 미 국가정보국장은 이듬해 2월 상원 청문회에서 북한이 추가로 우라늄 농축시설을 보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현재 영변의 원심분리기는 두 배 늘어난 4000개로 추정되고 있다.
 
HEU 계획과 시설을 둘러싼 북한 움직임은 비핵화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일러준다. 북한의 비핵화 진정성과 협조가 없으면 숨바꼭질이 불가피하다. 지상 고정형 원자로와 핵 재처리시설 가동을 거쳐야 하는 플루토늄 핵무기 루트와 달리 HEU 핵무기 루트는 자발적 신고가 없으면 파악이 어렵다. 이동식 미사일 발사대와 마찬가지다. 게다가 북한은 온통 산악 지대이고, 곳곳에 지하 시설이 구축돼 있다.
 
지금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는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의 대소련 군축 협상 원칙인 ‘믿어라, 그러나 검증하라(Trust but verify)’를 참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북한의 최초 신고와 사찰단의 검증 간에 불일치 문제가 생기면 ‘불신하라, 그리고 검증하라(distrust and verify)’로 바뀌는 것은 시간문제다. 신뢰 붕괴는 또 다른 위기의 서막일지 모른다. 1993년 1차 북핵 위기는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신고한 플루토늄 추출량(90g)·횟수(1회)와 IAEA 임시사찰 결과(수 ㎏, 3회)와의 중대 불일치 문제로 시작됐다. 검증 작업이 외줄 타기와 한가지인 이유다. 6·12 북·미 정상회담 후 비핵화 로드맵에 관한 후속 협상이 속도를 내지 못하는 것은 북한의 비핵화 진정성과 검증 체제 수립 문제가 함께 얽혀 있을 수도 있다. 여기에 북한은 비핵화를 단계적으로 한반도 평화협정이나 북·미 수교 등 체제 보장과 맞바꾸자는 입장이다. 핵 개발 계획 단계에서 포기한 리비아 모델과는 비핵화 방정식의 차원이 다르다는 얘기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북핵 전문가들의 비핵화 시간표에 큰 차이가 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헤커 교수는 10년간의 3단계 비핵화 해법을 제시했다. 지난달말  공개한 보고서 ‘기술적 관점에서 본 북한 비핵화 로드맵’에서다. 이 로드맵은 핵 검증·폐기의 기술적 측면을 넘어 북·미 간 신뢰의 적자(赤字) 관계를 전제로 삼았다. 보고서는 “이 접근법은 북한이 체제 보장이 이뤄질 때까지 핵무기와 핵 계획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다. 체제 보장은 (북·미 간) 서면 합의로 이뤄질 수 없고, 상당 기간의 공존과 상호의존이 필요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전체 비핵화 대상을 8개 분야(22개 항목)로 분류했다. ①개발 핵무기 ②핵 개발 종사 인원과 기술 ③핵실험 ④미사일 시험발사 ⑤플루토늄 루트 ⑥핵융합(수소탄) 물질 ⑦우라늄 농축 루트 ⑧ 핵미사일 기술 수출 중지가 그것이다. 22개 항목에 대해선 1년 미만의 단기 동결(halt) 단계, 2~5년의 중기 감축(roll back) 단계, 6~10년의 장기 폐기(eliminate) 단계로 나눴다.
 
 
핵 개발 계획 단계였던 리비아와  차원 달라
 
예컨대, HEU 재고량의 경우 1단계 우라늄 농축 지원시설 동결, 2단계 신고와 감시, 3단계 폐기로 잡았다. 플루토늄 재고량도 같은 내용이다. 플루토늄 핵무기의 출발점인 5㎿e 원자로에 대해선 1단계 동결, 2단계 해체(dismantle), 3단계 폐로(decommission)를 제시했다. 반면 영변의 공개된 우라늄 농축시설은 5㎿e 원자로 폐기 시간표와 큰 차이가 났다. 1단계 동결과 사찰, 2단계 사찰, 3단계 추후 결정으로 잡았다. 북한이 이 농축시설을 실험용 경수로 연료(저농축 우라늄) 생산용이라고 하는 것을 참작한 듯하다. 헤커는 보고서 작성 후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핵 관련) 수십 개의 장소, 수백 개의 건물과 수천 명의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자신의 로드맵이 트럼프 행정부나 미 동맹국, 전문가 그룹이 요구해온 신속한 비핵화와 거리가 있는 데 대한 설명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북·미가 직면할 정치적, 기술적 불확실성을 고려하면 비핵화는 15년이 걸릴 것으로 평가한다”고 강조했다.
 
헤커 보고서는 향후 제기될 수 있는 쟁점 사안도 담았다. 첫째는 핵무기 해체 문제다. 보고서는 “핵무기를 조립한 사람이 핵무기를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자해지가 답이라는 얘기다. 이는 핵무기를 미국으로 반출해 해체해야 한다는 존 볼턴 미 국가안보보좌관의 입장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둘째는 상업용 핵 프로그램과 평화적 우주 이용 계획이다. 지금까지 미국은 상업용 핵 시설이 플루토늄 제조용으로 전용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여왔다. 북한의 숱한 기만이 부른 불신 때문이다. 반면 북한은 현재의 실험용 경수로는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위성 발사용 장거리 로켓 문제에 대한 북한과 관련국 입장도 하늘과 땅 차이다. 보고서가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 종사자들을 관련 분야 폐기와 상업용 부분에서 활용하는 방안을 제시한 것은 주목거리다. 이 부분은 북·미 간 비핵화 실무 협상에서 큰 논란이 될 가능성이 크다.
 
헤커와 달리 단기간에 북한 비핵화가 가능하다는 전문가도 적잖다. 데이비드 올브라이트 미 과학국제안보연구소(ISIS) 소장이 대표적이다. IAEA 이라크 사찰관을 지낸 올브라이트는 헤커 보고서가 공개된 다음 날, 2년 안에 주요 핵무기 프로그램의 폐기가 가능하다는 보고서를 냈다. 북한의 전면 비핵화와 협조 약속을 전제로 해서다.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의 검증된 폐기에 대해선 30개월이 걸릴 것으로 평가했다.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 폐기는 플루토늄이나 핵무기 제조 프로그램보다 오래 걸린다. 올브라이트는 “이 세 개의 비핵화 과정이 병행적으로 실시되는 것이 긴요하다”며 “IAEA가 그램(g) 단위의 핵폭발 물질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면 전체 비핵화 과정은 수년 더 걸릴 것”이라고 설명했다. 올리 하이노넨 전 IAEA 사무차장도 비핵화가 2~3년이면 될 것이라고 언론에 밝혔다. 하이노넨은 1, 2차 북핵 위기 때 IAEA의 영변 핵 시설 사찰 업무를 주도했던 인물이다. 올브라이트와 하이노넨의 단기 비핵화론은 헤커와 달리 정치·외교적 측면을 적게 고려한 측면이 있다. 한국에선 핵무기와 미사일 등 위협이 큰 대상을 먼저 폐기하는 로드맵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강하다. 비핵화 과정이 남북 간 군사적 긴장 완화 조치나 종전 선언 등과 맞물려 가게 돼 있는 만큼 군사적 균형이 담보돼야 한다는 얘기다.
 
 
북·미 섣부른 정치적 타결은 동맹에 부담
 
북·미 정상회담 후속 실무 협상이 곧 재개되면 북핵 외교는 2라운드에 접어든다. 최대 쟁점은 북한 비핵화 로드맵 마련이다. 그 전제는 김정은이 한·미·중에 공약한 ‘완전한 비핵화’의 진정성이다. 이것 없는 비핵화 로드맵은 주춧돌 없는 집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진정성 문제도 있다.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 비핵화(CVID) 관철 문제다. 미국 일국주의, 트럼프 정권의 편의주의는 국제사회에 대한 배신이다. CVID는 미국의, 트럼프의 공약이다. 섣부른 정치적 타결은 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 동맹을 금가게 하고 동맹에 부담만 지운다. 다시 진실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오영환 군사안보연구소 부소장·논설위원 hwas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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