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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부르고 기분 좋아지는 나라

중앙선데이 2018.06.30 01:00 590호 31면 지면보기
[책 속으로] 요조의 책잡힌 삶
안녕, 주정뱅이

안녕, 주정뱅이

맥주를 좋아한다. 사람들과 어울려 마시는 것을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점점 혼자 마시는 것을 더 즐겨 하는 사람이 되었다. 아침 점심을 아주 푸짐하게 먹는 편이라 상대적으로 저녁에 밥 생각이 없을 때가 많다. 그럴 때면 늘 만드는 안주와 함께 맥주를 한두 캔 마시면서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고 아롱아롱한 기분으로 잠자리에 든다. 이 시간을 좋아한다. 내가 만드는 안주는 거의 한 가지뿐인데 뭐냐하면 황태채구이이다. 황태채를 한입 크기로 잘라 달군 팬에 바짝 구워낸 다음, 마요네즈와 간장 그리고 매운 청양고추를 종종 썰어 넣은 소스에 찍어 함께 먹는 것이다. 언제나 그 안주만 만들어 먹기 때문에 냉장고 안에는 대용량 황태채가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술자리는 이제 두 개뿐이다. 하나는 팟캐스트 팀원들과의 회식,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아버지와의 술자리이다. 제주에 사는 나는 서울에 올라올 때마다 부모님 댁에서 머물고 있다. 그때마다 꼭 한 번은 아버지와 술잔을 나누는 밤을 보낸다. 특히 선거철에는 토론회를 보면서 마시다가 그대로 이야기가 길어져서 새벽이 다 가도록 마시는 날이 많았다. 한 번 정도는 언쟁이 날 법도 한데 우리는 의견충돌 한 번 없이 되려 우정이 점점 두터워지는 것이어서 결국 아버지는 선거 때 본인의 정치적 성향을 철회하고 내가 지지하는 후보로 뜻을 모아주기까지 했다.
 
집 안에서 잉여하는 모든 먹거리가 우리의 맛있는 안주가 되었다. 안주는 풍성할 때도 있었고(특히 명절 때) 치명적인 단독 안주(맛있게 잘 익은 김치 하나)를 두고 술을 마신 적도 있다. 어느 날 김치냉장고에서 방치되고 있는 황태채를 발견했다. 내가 먹던 대로 황태채구이와 소스를 만들었다. 그날 우리는 술을 여느 때보다 많이 마셨다. 그렇게 제주로 내려갔다가 몇 주 후 다시 서울을 찾았을 때 아버지는 슬금 내 방으로 다가와 ‘딸 맥주 한잔하지’ 했다.
 
오늘 뭐 먹지?

오늘 뭐 먹지?

그리고는 지난번 해줬던 황태채구이를 또 해줄 수 있는지 물었다. 특정 안주를 먼저 아버지가 찾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술이 좀 얼큰해진 아버지는 이 안주가 그동안 생각이 많이 났다고, 호프집에서 먹는 것보다 더 맛있다고 진심으로 기쁜 얼굴로 말했다. 나는 그다음 날 바로 대용량 황태채를 사다가 서울의 냉장고에도 쟁여두었다. 나의 술친구를 위해.
 
장강명 작가님과 함께 진행하는 도서 팟캐스트에 권여선 작가님이 『안녕, 주정뱅이』라는 책으로 출연해 주신 적이 있었다. 모든 에피소드에 술이 등장하고 당신도 술을 무척 좋아한다고 스스럼없이 밝히셨던 작가님에게 훌륭한 안주로 괜찮은 음식을 추천해달라고 부탁했다. 작가님은 ‘의외로 김밥이 술안주로 괜찮거든요’ 하고 대답하셨다. 반가워서 깜짝 놀랐다. 실제로 내가 아버지와 먹었던 안주 중에는 김밥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권여선 작가님의 김밥 예찬을 『오늘 뭐 먹지?』라는 책을 통해서 더 구구절절하게 확인하고 있다. 이 책은 그동안 소설에 술 얘기 좀 그만 쓰라는 주변의 타박에 고통받다가 에잇 못 참겠다 하고 작정하고 쓴 술안주 이야기이다.
 
이 책의 글들이 하나같이 활기가 넘치고 신이 나 있는 것은 당연하게도 작가님이 다시 ‘술국의 언어’를 되찾았기 때문일 것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과 환절기로 꼼꼼히 나뉜 목차마저 버리는 것 없이 알뜰하게 소분된 식재료처럼 보인다.
 
일하러 가는 길, 차 안에서 이 책을 읽다가 운전을 하던 매니저에게 말했다. “권여선 작가님은 소주를 마시게 되면서 음식의 맛을 더 폭넓게 알게 되셨대요.” 매니저는 어쩐지 아득해진 눈으로 “저도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녀도 술국인이었던 것이다. “맛있는 음식을 소주와 함께 먹는 건 얼마나 좋은 일인지 몰라요. 맛있는 음식만 먹으면 배만 부르지만 소주와 함께 먹으면…”, 나는 이어지는 말을 기다렸다.
 
“배도 부르고, 기분도 좋아지잖아요?”
 
일터로 가는 차를 돌려 이대로 맛있는 음식과 달큰한 소주 한 잔 나누러 어디든 가자는 말을 참느라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요조 뮤지션 chaegbangmusa@gmail.com
뮤지션. 제주의 책방 ‘책방무사’ 대표. 『눈이 아닌 것으로도 읽은 기분』을 썼다. 팟캐스트 ‘책, 이게 뭐라고’를 장강명 작가와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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