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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늘 사소한 것에서 실패한다

중앙선데이 2018.06.30 01:00 590호 31면 지면보기
책 속으로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황현산 지음, 난다

문학평론가 황현산의 새 산문집
2013년 ‘밤이 선생이다’ 후속작업
문학의 눈으로 살펴본 한국사회
암투병에도 한 문장 한 문장 벼려

평단·일반의 고른 지지 받는 대가
프랑스 로트레아몽 시집도 번역

 
말도로르의 노래
로트레아몽 지음
황현산 옮김, 문학동네
 
혜성같이 출판시장에 나타나, 식자층은 물론 출판시장 일반 대중독자 층에도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문학평론가 황현산의 책 『밤이 선생이다』는 2013년에 출간되었다. 물론 이미 황현산은 당시 인문학계와 문단에서는 작가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친구’이며, 최고의 프랑스 시 번역가이자 연구자로 평가받는 큰 스승이었다. 십수 년 간 자신이 쓴 여러 종류의 칼럼들을 묶은 이 책은 품 넓은 사회적 안목, 미학적·철학적 사유의 깊이, 서늘하고 수려하기 이를 데 없는 문장으로 뜨거운 지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평생을 문학작품의 해석과 번역에 투신한 대가의 사회적 글쓰기는 첨예한 문학정신이 참된 역사 인식과 다른 것이 아니며, 시의 윤리와 민주적 삶에 대한 사회비전이 결코 분리된 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훌륭한 예시가 되었다. 책이 출판되던 시기는 시민적 삶이 제도정치의 전면적 파탄에 의해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는 사회적 위기의식이 심화되던 시기였다. 시민들에게 이 책이 큰 용기와 거짓 없는 위로가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문재인 정부 출범 초기 노회찬 정의당 대표가 청와대를 예방하면서 문재인 대통령 내외에게 이 책을 선물했던 것에는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문학평론가이자 번역가인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 투병 중에 산문집과 번역시집을 출간했다. [중앙포토]

문학평론가이자 번역가인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 투병 중에 산문집과 번역시집을 출간했다. [중앙포토]

그 황현산의 책 두 권이 동시에 출간됐다. 산문집 『사소한 부탁』과 로트레아몽 시집 『말도로르의 노래』 번역본이다. 산문집 『사소한 부탁』은 『밤이 선생이다』의 후속편이라 할 만하다. 『밤이 선생이다』 이후 2013년 봄부터 2017년 가을까지의 글들을 묶었다. 정확히 박근혜 정부 시기에 걸쳐 있다. 이 책은 교육·대학의 위기와 소녀상과 남북한 전쟁위기, 청소노동자, 헬조선과 시 등 다양한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어떤 얘기든 간에 ‘문학적인’ 문장으로 가득하다. 명철한 지성이 역사의 전망을 포괄할 때, 비판적 산문정신은 시의 비전과도 통한다는 사실을 황현산만큼 섬세하며 깊이 있게 보여주는 예는 흔치 않다. 책의 표지에도 인용된 “우리는 늘 사소한 것에서 실패한다”는 문장은 의미심장하다. 필자는 ‘사소한 것’, ‘사소하게 보이는 것’이야말로 사소한 것이 아니라고 여긴다. 정치와 역사의 진보, 문화의 진화라는 것도 ‘사소한 것’을 어떻게 삶과 미학의 중핵으로 인식하고, 어떻게 그것과 진정으로 만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헌정사 최초의 대통령 탄핵 역시 이 책의 관점에서는 ‘사소한 것’에 계속 실패한 결과일 수 있다. 그의 모든 글이 그러하듯, 이 책 역시 몽매한 중생이 보살이 되려는 의지를, 작은 이익으로만 뭉쳐있던 군중이 보편성을 담지한 시민이 되는 정신의 도약을 촉진하며, 변두리 을의 땅이 세상의 중심임을 선포할 수 있는 용기를 발휘하게 한다.
 
말도로르의 노래

말도로르의 노래

로트레아몽 시집 『말도로르의 노래』는 번역가로서 황현산이 진정한 의미의 문화 생산 없이 대중문화의 소비 행태가 압도적인 양상을 띠는 작금의 한국사회에 건넨 또 다른 메시지다. 이 시집은 20세기 현대 문학·예술·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초현실주의 문학의 모체로 불리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정상적 논리구조로 해독이 불가능한 문학적 연상 과정으로 인해 인류의 문헌 중에서 극히 난해하며 번역이 매우 어려운 텍스트로 평가되어 왔다. 하지만 꿈 이미지가 보이지 않는 정교한 논리를 지닌 것처럼 이 작품 역시 내적 서사를 지니고 있으며, 19세기 이전 서구 지성사에 대한 광범위한 독서편력이 문장의 바탕이 되었다. 광기와 비의와 신성모독적인 문장의 이면에는 강력한 지성의 에너지가 뒷받침되어 있다. 이 작품은 ‘끝까지 가는 정신’이 무엇인가를 보여줌으로써 인간 정신의 반항성과 극단성을 저주받은 언어로 드러내는데, 이로 인해 이 시집은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이 유일한 현실이 아닐 수 있다는 현대적 비의를 생산함으로써 현대시와 현대예술의 특별한 예외이자 기념비적 전형이 되었다.
 
19세기 벨기에에서 출간된 이후 한 세기도 훨씬 더 지났지만, 그나마 현존 최고의 프랑스 시 번역가로 평가되는 황현산에 의해 번역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몹시 흥분되는 일이다. 보들레르, 랭보, 말라르메, 아폴리네르, 브르통에 이어 로트레아몽까지 황현산의 언어로 모두 번역됨으로써, 현대세계문학사의 큰 줄기인 프랑스 현대문학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한국에서는 비로소 이제야 단단한 기초를 마련하게 되었다. 서구적 근대의 완결이자 균열로서, 나아가 근대 이후를 강력하게 예비했던 강력한 증상의 궤적들을 투병 중에도 한 문장 한 문장 좇고 맞서고 벼리어 혼신의 힘으로 세상에 내놓은 대가의 성의에 옷깃을 여밀 뿐이다.
 
함돈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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