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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언의 시시각각] 정작 울어야 할 이는 김명수

중앙선데이 2018.06.30 01:00 590호 34면 지면보기
이상언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

대화가 끊겼다. “대법관님”하고 불러도 반응이 없었다. 잠시 뒤 흐느낌이 들려왔다. “미안해요, 내가 주책없네”라는 말을 목이 메여 힘겹게 했다. 그는 울고 있었다. 숙연과 비장, 그런 분위기가 한동안 흘렀다.
 

‘위엄의 성벽’ 한순간에 무너뜨려
판사·재판 불신 부추긴 대법원장

25일 K 전 대법관에게 전화한 것은 검찰의 대법원 수사에 대한 생각을 듣기 위해서였다. 고희(古稀)를 넘긴 그는 “대법원 판결 거래라는 게 애당초 가능하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만한 법관들이 왜 일을 이 지경으로 몰고 갔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의 말이 끊긴 것은 “어쩌다 법원이 이렇게까지 됐는지”라는 한탄 뒤였다. 이틀 뒤 다시 전화했다. 울음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싶었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사법연수원 교수를 하며 후배 판사들을 가르쳤어요. 그러니 내게도 지금 상황에 책임이 있는 것 아니겠어요.” 회한과 자책의 눈물이었다.
 
K 전 대법관은 대화 중에 존 로버츠 미국 연방대법원장이 ‘캐퍼튼 대 매시 석탄회사’ 사건 판결에서 “법관은 진실하고 강직하다는 전제(presumption)가 존재한다”고 의견을 낸 일화를 말했다. 이 사건은 브렌트 벤저민이라는 웨스트버지니아주 항소법원 판사가 매시 측의 정치적 후원을 받고 편파적 판결을 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벌어진 일이었다. 로버츠 대법원장의 주장은 판사가 매수됐음을 입증하는 명백한 증거가 없는 한 그가 양심에 따라 재판했다고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 103조에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쓰여 있다. 대법관 출신인 김황식 전 국무총리가 페이스북 글에서 “양심은 법관 개인의 소신이나 철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사회적 상당성을 가진 객관적 양심을 말하는 것”이라고 설명한 적이 있는데, 그래도 양심의 실체를 모르겠다.
 
사실 법관이 양심에 따랐는지, 사심(私心 또는 邪心)에 이끌렸는지 알 길이 없다. 그가 고백하지 않는 한은 그렇다. 법관이 법률과 양심을 따른다는 것은  ‘합의된 믿음’에 불과할지 모른다. 이해력·판단력이 뛰어난 사람을 판사로 뽑아, 쉽게 유혹에 흔들리지 않도록 높은 지위를 부여하고, 윤리적 삶을 영위하라고 교육·감독하는 것은 그런 믿음에 대한 보조 수단일 뿐이다. 무결성을 보장하는 근원적 해법은 될 수 없다.
 
대략 100년 전까지 동서를 막론하고 재판은 초월적 존재가 하는 일이었다. 신의 대리자인 사제, 하늘의 명을 받드는 왕 또는 그 왕을 대리하는 관리가 했다. 그런 세계가 허물어진 뒤 생사·존망·성패 여부를 가르는 힘이 사람에게 주어졌다. 그렇게 심판자의 절대적 권위가 사라지자 판결 불복의 위험이 커졌다. 성직자 옷 같은 법복, 제단을 닮은 법대, 가발, 종신 법관제는 ‘사람 판사’가 그래도 보통 사람은 아니라고 우기는 일을 돕고 있다.
 
영국 드라마 ‘크라운’에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공주 시절에 이튼 칼리지 부학장으로부터 월터 배젓(1826∼1877)의 통치론을 배우는 장면이 나온다. 잡지 ‘이코노미스트’의 편집장이었던 배젓은 국가운영에 ‘위엄의 영역’과 ‘효율의 영역’이 있다고 했다. 오늘날 개념으로 풀이하자면 국리민복을 꾀하는 행정·입법은 효율의 영역에, 국가 통합과 분쟁 해결의 책임을 진 국가원수와 대법원은 위엄의 영역에 속한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재판 거래 의혹을 키워 대법원에 대한 검찰 수사를 자초했다. “거래 증거는 없다”는 법원행정처장과 “거래가 말이 되느냐”는 대법관들의 말을 믿지 않고 스스로 위엄의 성벽을 무너뜨렸다. 그 뒤 검사들이 칼을 들고 입성하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역할을 망각한 과오의 대가를 그렇게 치르고 있다. 통한의 눈물을 흘려야 할 사람은 K 전 대법관이 아니라 김 대법원장이다. 
 
이상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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