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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뱃심과 뒷심

중앙선데이 2018.06.30 01:00 590호 35면 지면보기
고선희 방송작가·서울예대 교수

고선희 방송작가·서울예대 교수

어렸을 때 축구 국가대항전 중계에서 거의 빠지지 않고 들었던 말은 “우리 선수들, 뒷심이 달린다”였다. 그 시절 우리 선수들 체격은 서구 선수들보다 확실히 왜소했고 후반으로 갈수록 체력도 현격히 달려서 보는 사람까지 숨이 찰 지경이었다. 경기에 패한 날엔 어김없이 “뒷심이 달려 아쉽게 졌다”는 평이 나왔고, 중계를 함께 본 어른들은 “잘 못 먹고 자라 그렇다”며 안타까워하셨다. 이번 월드컵 본선을 지켜보며 오래전 그런 일을 새삼 떠올린 건, 아마도 과거와는 사뭇 다른 우리 선수들 모습 때문이었을 거다. 축구 문외한인 내가 모르는 기술적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외관상 우리 선수들은 체격도 체력도 별로 뒤지지 않았다. 실망스러운 순간도 없지 않았지만 세계 1위를 상대로 뱃심 좋게 맞붙어 결정적으로 뒷심까지 발휘해 이겨주니 인물까지 다 훤해 보였다.
 
골이 터지던 순간보다도 손흥민 선수가 상대편 골문을 향해 전력 질주하던 그 순간이 내겐 제일 강렬했다. 그의 두 다리가 한순간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교차돼 영상을 빠르게 돌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우리 몸의 뼈 이백여 개 중 사 분의 일이 두 발에 모여 있다고 하던데, 그 순간엔 한 사람이 지닌 에너지 전부가 그의 두 발에 몰린 것 같았다. 수문장도 없는 골문은 확실한 기회고 그래서 그 기회는 상대의 실수로 얻어진 운에 불과한 것이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결정적 기회를 어이없는 헛발질로 날려버리는 경우를 우리는 적지 않게 봐왔다.
 
삶의 향기 6/30

삶의 향기 6/30

어디 축구 경기에서뿐이랴. 삶의 무수한 위기와 기회의 순간에 국가대표급 뱃심과 뒷심을 발휘해 무언갈 이뤄낼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 그런 의미에서 이번 독일과의 경기는 충분히 칭찬받을 만하다. 그 기회의 순간을 포착하고 재치 있게 어시스트한 선수나 총알같이 달려가 골을 성공시킨 선수나, 그 순간의 집중력은 하루아침에 나온 게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상당한 실력을 갖췄다고 해도 막상 중요한 기회나 위기의 상황에 놓이면, 평소의 실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제 실력을 충분히 발휘하고 오히려 평소보다 더 잘해내는 사람도 더러 있는데 그럴 때 우리는 흔히 “배짱 좋다. 뱃심이 두둑하다”고 한다. 배에서 어떤 힘과 용기가 나온다는 얘기인데, 예로부터 단전호흡을 통해 하복부 단련을 해온 것도 그런 것과 무관하지는 않은 것 같다. 단전호흡하시는 분들 말로는 하복부에 기운을 꽉 채우게 되면 마음도 든든하게 된다고 한다. 뱃심이 세어진다는 얘기다.
 
뱃심이 두둑하면 또 뒷심도 강해진다고 한다. 뒷심이란 건 말 그대로 허벅지 뒤쪽, 엉덩이 아래의 대퇴근에 힘이 생겨서 다리에서 발끝까지 기운이 뻗치는 그런 상태를 말한다는데, 뒷심이 세지면 심리적으로도 끈기와 책임감이 강해져 지구력이 세어진다는 것이다. 이번 월드컵 독일과의 경기에선 세계 1위인 상대에도 쫄지 않은 뱃심과 끝까지 있는 힘 다한 뒷심이 모두 발휘된 것 같다. 비록 16강 진출엔 실패했지만 우리 마음을 긍정적 에너지로 채워줬다는 점에서 칭찬받고 기억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우리 축구의 앞길은 평탄치 않은 것 같은데, 나처럼 평범한 시민은 그저 지지하고 응원해 줄 수 있을 뿐이다. 이번에 보여준 투지와 끈기, 그런 뱃심과 뒷심으로 계속 나아가면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희망으로 말이다.
 
이번 월드컵 본선에서 우리 삶의 축소판을 본다. 삶은 끝없는 도전이고 위기와 기회는 함께 온다. 그것은 늘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닥치어온다, 마치 뒤통수치듯. 이번에 전혀 상상치 못한 방식으로 완패한 독일이야말로 뒤통수 맞은 기분일지 모른다. 골문을 향해 질주하던 그 때 그 선수의 모습을 떠올리며 단전에 힘을 줘본다. 좋은 기운을 모아 뱃심을 키우고 뒷심도 다져놔야지. 삶의 장에서 우리는 각자 스스로의 대표선수니까 말이다.
 
고선희 방송작가서울예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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