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정재승 칼럼] 결정장애 부추기는 사회

중앙선데이 2018.06.30 01:00 590호 35면 지면보기
정재승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미래전략대학원장

정재승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미래전략대학원장

요즘 젊은이들이 자주 쓰는 단어 중에 “썸 탄다”는 표현이 있다. ‘N포 세대’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결혼이나 연애를 할 형편은 안 되고, 용기 있게 감정을 표현해 본 경험은 적다 보니 고백도 쉬운 게 아니다. 그렇다고 사랑에 대한 욕망이 사라진 건 아니니, 스스로도 확신이 없어서 ‘썸’의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관계 맺기에 서툴고 거절의 공포가 심각한 젊은이들이 옛날에 비해 박력 있게 고백하는 경우가 점점 줄어 어정쩡한 관계 상태가 늘어나고 있다는 얘기다.
 

지나치게 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결정 빨리 내리지 못하고 고민하는
‘결정장애 세대’란 사회현상 등장
젊은이들에게 방황의 시간을 주고
‘실패해도 좋으니 도전하라’ 북돋자

‘정보의 바다’ 현대사회에서 ‘큐레이션’이라는 말도 부쩍 늘었다. 예전에는 널려있는 정보를 선택하는 것이 그 사람의 능력이었는데, 요즘은 선택 자체를 거부하는 사람이 타인의 선택에 의지하는 경향이 늘어났다. 결정장애를 앓고 있는 현대인들을 대신해 BJ가 선택을 대신 해주는 팟캐스트 방송이 인기를 끈다. ‘전문가가 권하는 7대 여행지’ 같은 식으로, 상품 소비 결정을 못 하는 사람들을 위한 큐레이션이 하나의 마케팅 패턴으로 등장했다. 식당에서는 뭘 먹을까 결정하기 힘든 손님들을 위해 ‘아무거나’라는 메뉴를 판다.
 
결정장애 사회현상을 ‘햄릿 증후군(Hamlet Syndrome)’이라 부른다. 1989년에 처음 명명된 이 증후군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무엇을 선택할지 잘 몰라서 고통스러워하는 심리상태를 앓고 있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난 데에서 나온 말이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의 주인공처럼 결정을 빨리 내리지 못하고 오랫동안 고민하는 사람들이 사회현상이라 불릴 만큼 만연해 있다.
 
심지어 요즘 세대를 ‘결정장애 세대’라고까지 부른다. 예를 들어, 독일에선 ‘메이비(Maybe) 세대’란 표현이 2012년에 등장했다. 한 젊은 저널리스트가 미국 담배회사 말보로의 광고 문구 ‘Don’t be a Maybe‘에 착안해서 독일의 한 신문에 칼럼을 기고하면서 만들어진 단어다. 원래 광고 문구는 ’Maybe라는 말은 남자가 써서는 안 되는 말이다. 남자답게 살아라‘라는 의미였지만, 요즘 세대는 너무 많은 선택지 중에 뭘 골라야 할지 몰라서 ’Maybe‘를 연발하고 있다는 게 칼럼의 요지였다. 결정장애는 전 세계적인 현상인 모양이다.
 
원래 선택은 누구에게나 어렵다. 중요한 선택일수록 더욱 그렇다. 하지만 현대인들에게 결정장애가 사회현상이 될 만큼 점점 만연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이 전 세계적인 현상이라면 지구가 모두 경험하고 있는 현상에서 답을 찾아봐야 할 텐데, 인터넷 때문에 우리가 지나치게 많은 정보에 노출돼 있다는 데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 비하면, 우리가 경험하는 정보의 양은 현저히 늘어났다. 모바일 시대로 들어서면서 정보에 더 빠르고 간편하게 접근할 수 있게 됐고, 소셜 미디어(SNS)의 등장으로 크게 늘어난 정보를 무차별적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저널리스트 데이빗 솅크가 ’데이터 스모그‘라고 부른 것처럼, 의미 있는 정보가 무엇인지 옥석을 가리기 어려운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미래는 점점 불확실하고, 뭘 믿어야 할지 판단하기 어려워지는 현실 속에서 ’햄릿 증후군‘은 자연스러운 현상일지 모른다.
 
결핍이 욕망을 낳는다. 뭔가 부족해야, 그 결핍 때문에 뭘 하고 싶다는 욕망이 생긴다. 미국의 베이비부머 세대나 한국의 밀레니얼 세대는 결핍 없이 살았기 때문에, 딱히 무언가를 욕망하지 않는다. 요즘 아이들은 영어를 잘하고 싶어 해외에 보내달라고 떼쓰지 않아도,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부모가 알아서 해외연수를 보내준다. 자녀가 공부의 부족함을 느끼고 학원이나 과외를 받게 해달라고 말하기도 전에, 부모가 먼저 알아보고 가장 좋은 학원에 데리고 간다. 그들은 결핍이 되기 전에 욕망이 충족된 경험을 오랫동안 해오면서 무언가를 절실히 욕망하지 않는 세대로 성장하게 됐다. 대학을 졸업하고 스스로 독립해야 하는 시기가 오면, 내가 뭘 하고 살지 결정을 못 하는 문제에 직면한다. 내가 진짜 원하는 삶이 무엇인가 고민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젊은 세대의 결정장애 증후군은 아마도 ’사회적 안전망의 부족‘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예전에는 잘못된 선택을 해도 재기할 기회가 많았다. 경제 성장기였기에, 좋은 대학을 못 가거나 성적이 나빠도 취직 걱정을 덜 했다. 방황하느라 시기를 놓쳐도 늦게라도 결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사회에서 요구하는 기준을 제때 맞추지 못하면, 완전히 낙오되고 패자부활전은 점점 줄고 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만연해있고 사회안전망이 부재한 상황은 사람들에게 결정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젊은이들에게 사회적 안전망을 마련해주자. 나이에 따른 채용의 차별을 없애서 방황의 시간을 마련해주자. 직장을 구하거나 준비하는 동안, 생활비 정도는 국가가 책임져주자. 배낭여행 말고도 의미 있는 경험을 할 기회를 제공해주자. 그들의 야심 차고 자발적인 시도에 과감하게 투자해주자. 그러고 나서, ’실패해도 좋으니 도전하라‘고 북돋자. 패자부활전을 만들어주고, 실패의 경험이 자산이 되는 사회를 물려주자. 공허한 선언이 아니라, 이를 위해 실제로 제도를 바꾸고, 예산을 마련하자. 제발 좀.
 
정재승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미래전략대학원장

구독신청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