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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가 필요해” 요즘 다시 뜨는 살롱문화

중앙일보 2018.06.26 00:01 종합 19면 지면보기
합정동 취향관에서는 멤버들이 둘러 앉아 생각과 취향을 공유하는 문화살롱이 수시로 열린다. [사진 취향관]

합정동 취향관에서는 멤버들이 둘러 앉아 생각과 취향을 공유하는 문화살롱이 수시로 열린다. [사진 취향관]

지난달 25일 금요일 저녁, 젊은이들로 복작거리는 합정동의 한 2층집. 겉모습은 영락없는 양옥 주택인데 내부는 전혀 달랐다. 호텔처럼 ‘컨시어지’가 보이고 오른쪽 방엔 바가 있다. 10여 명의 사람들이 바에서 칵테일을 기울이며 종이에 뭔가를 그리고 있다. 드로잉 작가인 성립과 함께하는 ‘아트 살롱’ 시간이다. 참여한 이들은 서로의 이름이나 직업을 잘 모른다. 다만 술과 대화, 그리고 그림을 좋아한다는 공통된 취향으로 소통할 뿐이다.
 

디지털 만남에 대한 피로증인가
집안에 바 만들고 회의실도 차려
그림·독서·요리 등 관심사 공유
19세기 파리처럼 자유롭게 토론

2층 양옥을 통째로 개조한 회원제 사교 공간 '취향관'의 외관. 오종택 기자

2층 양옥을 통째로 개조한 회원제 사교 공간 '취향관'의 외관. 오종택 기자

평일 오후, 취향관의 거실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멤버들. 오종택 기자

평일 오후, 취향관의 거실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멤버들. 오종택 기자

이곳은 지난 4월 문을 연 ‘취향관’이다. 서로 다른 취향을 가진 이들이 마음을 열고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는 일종의 사교 공간이다. 1층에는 거실과 바, 2층엔 소규모 모임을 위한 작은 방과 영상을 상영할 수 있는 미디어룸이 있다. 이 공간을 이용하려면 멤버가 돼야 한다. 시즌제 회원 가입 비용은 45만원. 3개월간 자유롭게 공간을 이용하며 음료 60잔 무료, 회원 한정 또는 공개로 열리는 모든 ‘살롱(클래스 겸 소모임)’에 참석할 수 있다. 
우연히 만난 상대와 커피·칵테일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시간과 주제가 정해진 살롱에선 콘텐트를 공유하고. 이야기를 듣다보니 19세기 유럽 문인들의 아지트에 숨어든 시간여행자가 된 것 같다. 이는 취향관이 추구하는 바이기도 하다. ‘사색과 대화가 있는’ 과거 프랑스 살롱 문화를 재현하는 것이 이곳의 목표다.
학교·직장·동호회 등 정형화된 공동체에 지친 젊은 세대가 새로운 커뮤니티 문화에 눈길을 돌리고 있다. 키워드는 ‘살롱(Salon)’이다. 취향관을 비롯해 인문예술공유지(地) ‘문래당’, 소셜살롱 ‘문토’, 창작자 커뮤니티 ‘안전가옥’, 독서모임 ‘트레바리’ 등이 프랑스의 살롱문화를 접목한 새로운 커뮤니티를 추구하고 있다.



소셜살롱 '문토'는 영화·글쓰기·요리 등 다양한 콘텐트에 걸맞은 리더를 정한 뒤 멤버를 모집한다. 멤버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대화의 시간을 갖는다. [사진 소셜살롱 문토]

소셜살롱 '문토'는 영화·글쓰기·요리 등 다양한 콘텐트에 걸맞은 리더를 정한 뒤 멤버를 모집한다. 멤버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대화의 시간을 갖는다. [사진 소셜살롱 문토]

프랑스어로 ‘방’을 뜻하는 ‘살롱’은 18~19세기 프랑스 예술가와 지성인들의 사교 장소를 의미한다. 당시 살롱을 출입하던 이들은 남녀노소, 신분·직위에 상관없이 평등하게 대화하고 토론했다. 출신이나 소속, 심지어는 이름이나 나이보다도 각자의 생각과 취향을 더 중히 여겼다.
살롱문화를 표방하는 현재의 커뮤니티들도 이같은 성격을 그대로 가져왔다. 가입 절차를 통한 멤버십 형태로 모임을 운영하지만 과도한 소속감을 요구하진 않는다. 회장이 회원들의 신상을 모두 파악하고 모임을 주도하는 구도도 아니다. 취향관·문래당·안전가옥은 공간을 매개로 자유로운 만남을 추구하고, 문토·트레바리는 관심사에 따라 모임을 구성해 그때그때 장소와 시간을 정해 만난다. 공통점은 모임의 누구도 서로의 신상을 궁금해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취향관 고지현 대표는 “몇 시간씩 대화를 나눈 멤버끼리도 직업이 뭔지 나이가 몇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며 “사회에서 중요했던 타이틀이 이곳에선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취향관에서는 낯선 사람들끼리도 편안하게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시작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 [사진 취향관]

취향관에서는 낯선 사람들끼리도 편안하게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시작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 [사진 취향관]

 
‘오그라든다’는 핀잔이나 눈총을 받지 않고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점도 이들 공간의 매력이다. 싸이월드에서 페이스북으로, 또다시 인스타그램으로. 젊은이들을 연결하는 온라인 플랫폼은 점점 더 텍스트보다 이미지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옮겨가고 있다. 간결하고 짧은 표현이 쿨하게 여겨지는 시대. 하지만 살롱에선 다르다. 문토에서 독립 잡지 만들기 모임 ‘진메이커스’에 참여하고 있는 박기남(28)씨는 멤버들과 작업물에 대한 고민을 나누는 시간을 즐긴다. 각자 잡지에 담고 싶은 주제와 풀어내는 방향을 놓고 진지한 대화가 오가기 때문이다. 박씨는 “나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 더 하기 쉬운 이야기가 있다”며 “혼자만의 생각과 고민들을 부담 없이 털어놓을 수 있는 분위기가 좋다”고 말했다.
 
문래당의 공용 공간. 회원들은 원하는 자리에 앉아 책을 읽거나 대화를 하며 시간을 보낸다. [사진 문래당]

문래당의 공용 공간. 회원들은 원하는 자리에 앉아 책을 읽거나 대화를 하며 시간을 보낸다. [사진 문래당]

주기적으로 세미나 또는 소모임이 열리기도 한다. 소정의 비용을 내면 멤버가 아니어도 참여할 수 있다. [사진 문래당]

주기적으로 세미나 또는 소모임이 열리기도 한다. 소정의 비용을 내면 멤버가 아니어도 참여할 수 있다. [사진 문래당]

‘문래당’은 인문예술공유지(地)라는 설명처럼 ‘인문학과 예술이 공유되는 땅’이다. 3년 전 서울 문래동의 한 건물에 터를 잡았다. 다양한 책으로 가득 채운 책장, 여러 사람이 함께 쓰는 너른 책상, 빔프로젝터 등이 있는 공용 공간과 운영진 등 상주 멤버들이 사용하는 개인 작업실로 구성됐다. 인문학 연구자, 작가, 예술가 등이 주축이라는 점에서 과거 프랑스의 살롱과 가장 유사하다. 문래당의 김이소 대표는 “학교나 직장 등의 소속 집단을 통하지 않고 사람과 사람의 연결이 어떻게 가능할지 고민하다 이곳을 운영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현재 회원은 40여명. 이들은 주기적으로 세미나와 소모임을 열어 각자의 지식과 생각을 공유한다. ‘친목’보다는 ‘콘텐트’를 중심으로,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문래당의 핵심이다.
 
장르문학 매니아들을 위한 도서관. [사진 안전가옥]

장르문학 매니아들을 위한 도서관. [사진 안전가옥]

성수동 ‘안전가옥’은 장르문학(SF·판타지·추리·호러 등 특정 장르의 관습을 따르는 문학) 매니아를 위한 도서관과 창작자들이 개인 작업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는 스튜디오를 함께 운영하고 있다. 공용 공간인 카페·도서관을 출입하는 분기별 시즌 패스는 15만원, 작업 공간 입주는 월 25만원이다. 안전가옥의 김홍익 대표는 “멤버들이 아지트처럼 드나들고 필요하다면 협업도 할 수 있는 오프라인 공간을 지향한다”고 말했다.
 
소셜살롱 ‘문토’와 독서모임 ‘트레바리’는 공간이 아닌 콘텐트 중심이다. 문토는 글쓰기·요리·영화 등 각 주제에 맞는 리더를 섭외해 모임을 구성하고 멤버를 모집한다. 마하키친의 신소영 셰프가 요리 모임 ‘생각하는 주방’의 리더를, 29cm의 총괄 카피라이터 이유미씨가 글쓰기 모임 ‘쓸 수 있는 밤’을 맡는 식이다. 트레바리는 인문·사회·자연과학 등 100여 개의 주제를 가진 독서모임을 4개월 단위로 운영한다. 가입 비용은 독서 멘토링을 해주는 클럽장의 유무에 따라 29만원 또는 19만원이다. 시즌당 16회 내외의 책 읽기 모임이 진행되고, 각종 공지와 활동 현황을 페이스북과 카카오톡 단체방을 통해 공유한다.
 
글=백수진 기자 peck.soojin@joongang.co.kr, 사진=오종택 기자, 각 업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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