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도박이 구원? 탈출해야 할 감옥!

중앙선데이 2018.06.23 02:00 589호 20면 지면보기
석영중의 맵핑 도스토옙스키 <24> 비스바덴: 감각의 지옥
프로코피예프의 오페라 ‘도박꾼’의 한 장면. 도스토옙스키의 동명 소설을 무대로 옮겼다.

프로코피예프의 오페라 ‘도박꾼’의 한 장면. 도스토옙스키의 동명 소설을 무대로 옮겼다.

“이번에는 룰렛 도박을 생생하고 자세하게 기술할 예정이에요. 분명 독자의 관심을 끌게 될 거에요. 어쩌면 꽤 괜찮은 소설이 될지도 몰라요.”  
 
도스토옙스키가 1863년 『도박꾼』을 구상하며 스트라호프에게 쓴 편지다. 비스바덴 카지노에서 극도의 흥분을 맛본 저자는 벌써부터 그 체험을 소설에 집어넣을 궁리를 하고 있었다. 소설은 몇 년간 그의 머릿속을 떠돌다가 1866년에 완성됐다. 돈·베팅·광기·도전·열정·운명의 시험 같은 소재가 워낙 흥미진진하다 보니, 소설은 두고두고 독자와 작곡가와 영화 감독과 드라마 제작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프로코피예프의 오페라 ‘도박꾼’을 필두로 러시아·영국·미국·독일·프랑스에서 동명의 영화와 미니시리즈와 라디오드라마가 지속적으로 만들어졌다.  
 
도박판은 자본주의 시장의 다른 이름  
프로코피예프의 오페라 ‘도박꾼’의 한 장면

프로코피예프의 오페라 ‘도박꾼’의 한 장면

배경은 룰레텐부르크, 라인 강변에 위치하는 가상의 도시다. 알렉세이는 모 장군의 가정교사로 장군의 양녀인 폴리나를 죽도록 사랑한다. 하지만 경쟁자인 영국인 사업가 에이슬리와 프랑스인 드 그리외 후작에 비하면 알렉세이는 재산도, 신분도, 초라하기 짝이 없다. 그는 가정교사라는 “모욕적인 신분”에서 벗어나 폴리나의 사랑을 얻기 위해 일확천금을 꿈꾼다.  
 
장군에게는 모스크바에 사는 부자 아주머니가 있다. 노환으로 다 죽어가는 아주머니의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으면 장군은 그동안 드 그리외에게 진 거액의 빚을 다 갚을 수 있다. 게다가 고급 매춘부 블랑슈 양과 결혼도 할 수 있다. 그는 수시로 모스크바에 전보를 쳐가며 아주머니의 사망 소식을 애타게 기다린다. “죽었어?”“아직도 안 죽었어?”  
알렉세예프의 『도박꾼』 일러스트레이션

알렉세예프의 『도박꾼』 일러스트레이션

 
그러던 차에 사망 전보 대신 휠체어를 탄 노마님 자신이 하인들을 거느리고 위풍당당하게 룰레텐부르크에 들이닥친다. 소문과는 달리 원기왕성한 할머니는 주위 사람들에게 불호령을 내려가며 룰렛판으로 돌진, 미친 듯이 베팅한다. “이런 할머니가 관 속에 들어가 매장되기를 기다렸다니! 유산을 남기기를 기다렸다니! 우리 모두 보다도 오래 버티겠어!”  
 
할머니는 일고여덟 시간을 꼼짝 않고 룰렛판에 눌어붙어 있다가 결국 파산한다. 만 하루 만에 가지고 있던 유가증권을 모두  날리고 영국인에게 돈을 꾸어 귀국한다. 장군은 절망의 구렁텅이로 떨어진다.  
 
러시아 알렉세이 바탈로 프 감독의 1972년 영화 ‘도박꾼’

러시아 알렉세이 바탈로 프 감독의 1972년 영화 ‘도박꾼’

알렉세이는 “폴리나를 위해” 도박장에 간다. 신들린 사람처럼 베팅을 해서 몇 시간 만에 20만 프랑을 딴다.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카지노는 발칵 뒤집히고 알렉세이는 전설의 도박꾼 명부에 이름을 올린다. 금화와 화폐 뭉치를 모자와 주머니에 쑤셔 넣고 호텔방에 돌아온 그는 폴리나에게 5만 프랑을 준다. 날이 밝자 폴리나는 그의 얼굴에 그가 준 돈 5만 프랑을 던지고 사라진다. 거부가 된 알렉세이에게 이제 블랑슈 양이 접근한다. “우리는 파리로 가서 같이 사는 거야. 나랑 있는 동안 당신은 환한 대낮에도 별을 보게 될 거야. 그렇게 한 달 사는 것이 당신 인생 전부보다 더 멋지다는 걸 모르겠어?” 알렉세이는 블랑슈 양과 파리에 가서 3주 만에 전재산을 탕진하고 구제불능의 도박꾼으로 전락한다.  
 
그레고리 펙과 에바 가드너가 주연한 1948년 영화

그레고리 펙과 에바 가드너가 주연한 1948년 영화

돈이면 다 되는 곳에서 다른 종류의 소통은 무의미
스트라호프에게 쓴 편지를 조금 더 읽어보자. “내 소설은 특별한 지옥, 감옥 목욕탕과 같은 그런 특별한 지옥을 묘사할 겁니다.”  
 
‘감옥 목욕탕’은 『죽음의 집의 기록』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앞을 가리는 증기, 그을음, 지옥 불 같은 열기, 바닥을 질질 끄는 백 개의 쇠사슬 소리, 욕설, 드잡이, 더러운 물, 뒤엉켜 어른거리는 벌거숭이 팔 다리와 빡빡 깎은 머리, 비명과 고함소리”로 가득 찬 죄수들의 공용 욕장은 지옥이었다. 도박에 관한 소설을 구상하면서 죄수들로 바글거리는 목욕탕을 떠올렸다는 것은 그의 창작 의도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헝가리 캐롤 막 감독의 1997년 영화 ‘도박꾼’

헝가리 캐롤 막 감독의 1997년 영화 ‘도박꾼’

도스토옙스키의 도박판은 무엇보다도 자본주의 시장의 축소판처럼 보인다. 룰레텐부르크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도시이지만 동시에 모든 곳에 존재하는 시장이다. 이곳에서는 누구나 언제나 계산하고, 베팅하고, 사고 판다. 본질적인 것도 없고 절대적인 것도 없다. 기차역 근처의 이 도시에는 날마다 사람들이 도착하고 사람들이 떠나간다. 모든 것이 유동적이다. 사람들의 재산도, 신분도, 관계도, 심지어 이름까지도 수시로 변한다. 영국인, 프랑스인, 러시아인, 독일인이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독일어로 말한다. 화폐 역시 굴덴, 프랑, 루블 등 온갖 단위가 다 사용된다. 하지만 아무런 불편도 없다. 오직 한 가지, 돈의 소통만 확실하면 된다. 다른 종류의 소통은 불가능하고 불필요하다.  
 
이곳에서 도덕적 잣대는 무의미하다. “도박이 다른 돈벌이 수단들보다, 예를 들어 장사보다 더 나쁘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이유에서인가? 보다 빨리, 그리고 보다 많은 돈을 따려는 바람이 결코 추악하다고 보지 않는다. 내기로 돈을 따서 이익을 남기는 것에 관해 말하자면, 사람들은 룰렛판이 아니더라도 곳곳에서 그런 식으로 돈을 벌고 있다. 다시 말하면 서로가 서로에게서 무언가를 빼앗고 따내고 하는 셈이다.”
 
“돈이면 다”라는 생각이 가장 단순하고 무지하고 뻔뻔스럽게 드러나는 곳이기에 알렉세이는 오히려 거기서 편안함을 느낀다. “내 스스로가 돈을 따려는 소망에 사로잡혀 있었던 탓인지 몰라도, 도박장으로 들어섰을 때 내게는 그 모든 탐욕과 탐욕의 모든 추악함이 왠지 더 편하고 친근하게 느껴졌다. 서로가 격식을 차리지 않고 흉금을 털어놓고 솔직하게 대할 때가 가장 기분 좋은 법이다.”  
 
세상을 지배하려는 끝없는 탐닉에 대한 경고
니콜라이 불랴예프 주연의 영화 ‘도박꾼’

니콜라이 불랴예프 주연의 영화 ‘도박꾼’

소설은 자본주의 비판에서 인간 본성 분석으로 이어진다. “저는 돈을 필요로 합니다. 하지만 제가 자본을 위해서 필요한 존재라던가 아니면 자본에 종속되는 존재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사실 그는 다른 것에 종속되어 있다. 처음에 그것은 폴리나에 대한 열정처럼 보인다. “나는 당신을 매일 매일 점점 더 사랑해요. 그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요.” 그는 폴리나의 노예를 자처한다. 그녀가 만일 슐란겐베르크 산봉우리에서 뛰어내리라고 하면 그는 그렇게 할 것이다. 그녀의 명령이라면 살인까지도 저지를 것이다.  
 
그러나 이 철저한 굴종의 이면에 있는 것은 철저한 지배욕이다. “돈만 있다면” 그는 노예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녀가 그를 사랑하는가 아닌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일확천금을 거머쥐고 그녀의 마음을 사느냐 마느냐, 궁극적으로는 그녀를 지배하느냐 마느냐, 이것만이 문제다. 그에게 사랑은 노예처럼 굴종하느냐 아니면 상대를 노예처럼 부리느냐, 둘 중의 하나다. 모출스키의 지적처럼 그의 열정은 “결코 미에 대한 숭배, 인격에 대한 존중이 아니다. 그것은 비이성적이고 악마적이고 파괴적이다. 살인적이며 자멸적인 어두운 고통이다.”  
프랑스 오탕-라라 감독의 1958년 영화

프랑스 오탕-라라 감독의 1958년 영화

 
알렉세이의 본심은 그가 카지노 측이 지불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돈을 많이 딴 그 순간 드러난다. “어제 내가 돈다발을 긁어모으던 그 순간부터 어쩐 일인지 나의 사랑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에게 소중한 것은 폴리나가 아니라, “사람들이 나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내게 감탄을 하고, 그 일에 대해 찬사를 보내고, 고개를 숙이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도박장에 가면 가슴이 죄어드는 듯한 전율을 느끼고 무더기로 쏟아져 내리는 금화 소리를 듣기만 해도 거의 경련을 일으킬 지경이 된다.  
 
산꼭대기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볼 때 느끼는 것과 같은 현기증, 그 아찔한 느낌, 모든 것을 다 거머쥔 느낌, 그 짜릿한 지배의 감각에 그는 중독된다. 여기에 사랑은 없다. 성공·승리·권력의 감각에 대한 끝없는 탐닉과 채워지지 않는 갈증만이 있을 뿐이다.  
 
지배를 향한 눈 먼 추구는 책임 회피의 다른 말이다. “운명에 반항하고 싶다는 이상한 생각이 내 안에서 솟아올랐다.” 운명을 시험한다는 것은 멋지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운명을 시험한 게 아니라 무책임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운명에 떠맡겼다. 운명의 수레바퀴에 말려들어간 채 도전의 환상, 부풀려진 자기 이미지가 주는 쾌락에 끝없이 빨려들어간 것이다.  
 
볼쇼이 극장이 발행한 ‘도박꾼’ 기념주화

볼쇼이 극장이 발행한 ‘도박꾼’ 기념주화

권력의 감각만 탐닉한 결과 그는 다른 감각은 다 잃어버렸다. “당신은 삶도 거부했고 자신과 사회의 이익도 거부했고 시민과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의무도 거부했고 친구도 거부했습니다. 돈을 따는 것 말고는 그 어떤 목표도 단념했고 심지어 추억마저 단념했어요.”  
 
알렉세이가 룰레텐부르크에서 도박을 시작하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다가 결국 다시 룰레텐부르크로 돌아오는 것은 그 자체가 출구 없는 감옥을 상징한다. 그는 아무 데도 가지 못한다. 룰레텐부르크라는 환영의 공간에서 빙빙 돌고 있을 뿐이다. 이곳에서 그는 평생 동안 인생역전을 꿈꾸면서 소멸해 갈 것이다. 따고 잃고, 또 따고 또 잃으면서, 오지 않을 어떤 것을 기대하며, 매번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자신을 속여가며, 점점 깊숙이 수렁으로 빠져 들어갈 것이다. 그는 끝까지 도박이 “유일한 탈출구이자 구원”이라 믿는다. 그러나 그는 도박을 통해 탈출할 수 없다. 중독은 구원이 아니라 탈출해야 할 감옥이다. ●
 
고려대 노문과 교수.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자유,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배운다』등을 썼다.

구독신청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