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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굴레에 묶인 권력자의 알몸

중앙선데이 2018.06.23 02:00 589호 30면 지면보기
샤우뷔네 베를린 ‘리처드 3세’ 
스캔들과 각종 비방으로 얼룩지는 선거전을 볼 때마다 권력이 뭘까 싶다. 사생활이 발가벗겨지고 온가족 멘탈이 탈탈 털리면서까지 잡고 싶은 게 권력이라면, 그렇게 손에 쥔 권력으로 대체 뭘 하려는 걸까.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처드 3세’는 일찌감치 인간의 변하지 않는 권력의지와 욕망에 현미경을 댄 고전이다. 1583년경 쓰여진 초기 역사극으로, 장미전쟁을 배경삼아 영국 요크 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던 실존인물 리처드 3세(1452~1485)를 사악한 욕망의 화신으로 그렸다. 곱사등이에 절름발이로 태어난 리처드 3세가 신체적 핸디캡을 증오로 불태우며 갖은 중상모략과 권모술수로 ‘왕좌의 게임’에서 승리하지만, 금세 헨리 7세에게 왕권을 뺏기고 만다는 허무한 이야기다.  
 
4대 비극 중 하나인 ‘맥베스’의 할배격으로 ‘권력무상의 화신’과도 같은 이 ‘리처드 3세’가 올해 한국 연극계에서 가장 핫한 남자가 됐다. 지난 2월 배우 황정민의 연극 복귀작으로 화제를 모았고, 현대 실험 연극의 중심지로 꼽히는 독일 샤우뷔네 베를린 버전이 지난주 내한 공연을 했다. 다음 주엔 프랑스 리무쟁 국립연극센터의 2인극 버전(6월 29일~7월 1일 명동예술극장)이 초청될 예정이다.  
 
유럽 연극계의 젊은 거장 토머스 오스터마이어 샤우뷔네 예술감독 연출로 2015년 초연한 ‘리처드 3세’는 “셰익스피어가 창조해낸 가장 매력적인 악역”이라는 리처드 3세의 거부할수 없는 매력을 관객에게 어필하는 데 방점을 찍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처럼 길게 늘어뜨려진 마이크를 붙잡고 재주를 넘고 스트립쇼까지 한다. 정치가들이 “한 표 달라”며 춤추고 쇼하는 꼴인데, 바로 오스터마이어가 직접 언급한 ‘엔터네이너 면모’다. 그는 “사악한 광대에게 유혹 당하며 공범자가 되는 관객은 리처드의 사악함을 자기 안에서 찾는 놀라운 경험을 마주하게 될 것”이라고 했었다.  
 
그래선지 ‘개들조차 짖어대는 흉측한 외모’라는 리처드는 그다지 보기 싫지도, 사악해 보이지도 않는다. “나를 사랑해주는 생명체가 하나도 없다”고 신세 한탄을 하며 핸디캡을 오롯이 노출시키니 오히려 동정심이 일어난다. 상대를 무장해제시키는 고도의 전술이다. 자신이 남편과 시아버지를 죽인 앤에게 사랑을 속삭이며 “당신의 아름다움 때문에 다 죽인 것”이라는 감언이설의 시전은 점입가경이다. 홀딱 벗고 진심을 호소하는 ‘악어의 눈물’에 갈대와 같은 여인은 속절없이 넘어가 버린다.  
 
셰익스피어 시대의 글로브 씨어터 원형을 충실히 살린 반원형 모래밭 무대로 객석을 가로지른 배우들이 뛰어들어 파티를 벌이고, 무대 한 켠의 드럼 한 대로 구사하는 자극적인 음향도 초반 몰입도를 부쩍 높였다.  
 
하지만 오스터마이어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았던 걸까. 2시간 반이 넘는 무대는 중반 이후 뒷심 부족이 느껴졌다. 관객을 끊임없이 유혹해야 할 리처드 3세의 방백이 눈에 띠게 줄고, 그의 사악함이 극을 이끌어간다기 보다 버킹엄 공작 등 주변 인물들의 음모와 배신의 과정이 충실하게 묘사된다. 여러 사람의 욕망이 뒤얽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정치판을 사실적으로 그렸다고 볼 수 있지만, 캐릭터 집중도가 떨어지니 연극적 효과는 덜했다.  
 
2년 전 내한공연 ‘민중의 적’이 한세기 전 대본임에도 가장 시의적인 사회문제로 질문을 던지며 객석을 토론의 장으로 만들었던 신선한 충격을 기억하는 관객에겐 다소 평범해 보였을 터다. 하지만 왕위에 오른 뒤의 상징적인 분장과 한 폭의 바로크 회화 같은 엔딩 장면은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목 기브스와 코르셋으로 몸을 억지로 펴고 못생긴 얼굴엔 두터운 회칠을 해 자기 모습을 완전히 감춘 채 어린 조카들과 아내를 죽이고 동지를 배신하는 리처드 3세의 모습에, 권력을 잃지 않기 위해 권력을 행사하는 외로운 광대를 본다. 자신이 희생시킨 망령들의 악몽에 시달리다 “말 한 필에 내 왕국을 내주겠다”며 삶에서 도피하고 마는 결말은 허무주의의 극치다.  
 
리처드 3세를 진정 죽인 건 헨리 7세와의 전투가 아니라 권력이라는 욕망의 굴레였을 뿐. 왕이라는 광대 분장을 벗어던진 뒤엔 자유를 찾았을까. 그의 외로운 영혼을 드러낸 찰나의 엔딩이 여운이 길다. ●
 
기간: 6월 14~17일
장소: LG아트센터
문의: 02-2005-0114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LG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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