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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만 배럴 싣고 온 유조선 C.엠페러호 … 핵 항모보다 큰 갑판 ‘화학 플랜트’ 방불

중앙선데이 2018.06.23 01:12 589호 25면 지면보기
울산신항 ‘수퍼 탱커’ 타보니 
원유 부이에 계류 로프를 걸고 원유를 내리고 있는 C.엠페러호. 원유 부이를 통해 시간 당 최대 6만 배럴의 원유를 하역할 수 있다. [사진 SK이노베이션]

원유 부이에 계류 로프를 걸고 원유를 내리고 있는 C.엠페러호. 원유 부이를 통해 시간 당 최대 6만 배럴의 원유를 하역할 수 있다. [사진 SK이노베이션]

수년간 배럴당 40~50달러에 머물던 원유값이(두바이유 기준) 3년 반 만에 배럴당 70달러 선을 돌파하면서 고유가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중앙SUNDAY가 초대형 유조선인 C. 엠페러호에 동승해 원유 하역 과정과 유가 변동의 세계를 취재했다. 우리나라는 한 해 11억1817만 배럴(2017년 기준)의 원유를 수입한다. C. 엠페러호는 배값만 1000억원에 달하는 초대형 유조선으로 적재량(200만 배럴)의 원유를 다 채우면 그 가치가 2500억원에 달한다. 2500억원이란 거액이 중동에서부터 한반도까지 떠오는 셈이다. 
 

이틀 걸려 하역
바다 위 부이 거쳐 저장탱크로 보내
폭발 우려로 스마트폰 사용 못해

한 번 항해에 50일
최고 시속 29.6㎞(16노트)로 항해
해적 대비 자동소총 무장 대원 승선

사회 현상 반영
선장 “유가 오를 땐 빨리 와라 연락”
매입 가격 차이만큼 이윤 늘기 때문

지난달 31일 오후 울산광역시 선암동 울산신항에서 4㎞ 떨어진 해상. C. 엠페러호에서는 쿠웨이트와 카타르 등 중동 지역에서 싣고 온 원유를 내리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배는 SK해운 소속이다. 길이 323m, 폭 60m로 미국의 핵추진 항공모함보다 덩치가 큰 유조선 외벽에는 직경 24인치(약 61㎝)에 달하는 초대형 수상 호스 두 개가 연결돼 있었다. 호스는 배에 담긴 원유를 바다 위 부이(Buoy·원유 하역시설)로 뽑아내는 장치다.
 
원유는 부이를 거쳐 6.8㎞에 달하는 해저 배관을 통해 뭍에 있는 SK에너지의 원유 저장탱크로 보내진다. 시간당 최대 6만 배럴의 원유를 내리지만 배가 워낙 크다 보니 하역에만 이틀의 시간이 걸린다. 배 위에선 끊임없이 “웅웅”하는 기계음이 들렸다. 원유를 내보내기 위해 C. 엠페러호에 장착된 세 대의 발전기가 쉼 없이 돌아가는 소리다.
 
유조선 승선 과정은 예상보다 복잡했다. 우선 울산세관의 확인 절차를 거쳐야 한다. 국제법에 따라 유조선이나 항공기는 해당 국적의 배타적 관할권에 속하기 때문이다. 공간적으로는 울산 앞바다에 있지만 파나마 선적의 C. 엠페러호 역시 그 나라의 주권이 미치는 공간이다.
 
 
길이 323m, 폭 60m 1000억 짜리 배
 
C.엠페러호의 항해 장치를 설명하고 있는 강성근 선장. [사진 SK이노베이션]

C.엠페러호의 항해 장치를 설명하고 있는 강성근 선장. [사진 SK이노베이션]

유조선에 오르는 건 떨림의 연속이었다. 세관을 통과한 뒤엔 통선(바다 위 선박과 육지 간 연락·중계를 돕는 작은 배)을 타고 20여 분간 바닷길을 달려 C. 엠페러호에 접근했다. 그러곤 유조선 옆에 내려진 철제 계단을 따라 40m가량을 올라가야 했다. 물살에 따라 배가 출렁거려 계단을 오르는 것만으로도 땀이 비 오는 듯했다. 그나마 파도가 높게 칠 때는 철제 계단을 내릴 수 없어 밧줄로 된 계단을 타고 수직으로 올라가야 한다. 배는 제자리에 정박해 있는 것 같지만 조류와 배에 연결된 예인선을 따라 부이 주변을 느리게 돌고 있다.
 
배에 오른 뒤에도 모든 게 조심스러웠다. 핵추진 항공모함보다 넓다는 갑판에선 스마트폰으로 사진조차 찍을 수 없었다. 원유 하역 과정에서 발생하는 유증기(Oil Mist)가 자칫 카메라 셔터에 반응하면 폭발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배 갑판은 거대한 파이프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어 언뜻 ‘화학 플랜트에 와 있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배 타고 접근 40m 계단 올라가
 
C.엠페러호의 갑판 모습. 갑판에는 화학 플랜트를 연상시키는 배관들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다. [사진 SK이노베이션]

C.엠페러호의 갑판 모습. 갑판에는 화학 플랜트를 연상시키는 배관들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다. [사진 SK이노베이션]

파이프 중간중간 공중전화 부스처럼 생긴 피난처(Shelter)가 보였다. C. 엠페러호의 강성근(56) 선장은 “대양에서 파도가 높게 칠 때 선원들이 휩쓸려 가지 않고 급히 피할 수 있도록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배 내부는 거대한 공장을 연상케 했다. 웬만한 자동차보다 큰 대형 발전기 세 대가 쉴 새 없이 돌아갔다. 그 앞에는 4만 마력의 힘을 자랑하는 터빈 엔진이 숨을 고르고 있었다. 신형 쏘나타 승용차(가솔린 1.6 터보 기준)의 최대 출력이 180마력이다.
 
원유를 들여오는 일은 경제 문제를 넘어 국내외 정치 문제를 포함한 지구사의 축소판이다. 우선 국제 유가가 다양한 정치·경제적 변수의 영향을 받으며 움직인다. 현재의 유가 상승세는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적인 경기 회복에 힘입은 수요 증가가 가장 큰 원인이다. 여기에 중동 산유국들의 감산 움직임도 이를 부추기고 있다.
 
중동 내부의 역학 관계도 C. 엠페러호를 비롯한 유조선들의 행선지를 바뀌게 만든다. 한 예로 C. 엠페러호는 과거 수년간 미국의 경제 제재가 완화된 이란산 원유를 적극적으로 들여왔지만 최근 미국의 경제 제재가 다시 강화되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중동 내 다른 국가들에서 원유를 받아오고 있다. 이번 항해에서는 쿠웨이트와 카타르산 원유를 들여왔다.
 
한 번 항해에 3000억원 가까운 돈이 걸려 있는 만큼 안전을 가장 중시한다. 최근까지 해적이 출몰한 아랍에미리트~스리랑카 구간을 지날 땐 자동소총 등으로 무장한 경비업체 인력이 유조선에 승선한다. 경비업체 중에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쉴드(Shield·방패)’란 곳도 있다. 유조선에 탄 선원들이 원유를 직접 거래하는 것은 아니지만 피부로 유가 변동을 체험한다. 강 선장은 “한국에서 최대한 항해 기간을 줄여서 빨리 와달라고 할 땐 유가가 오르고 있는 것이고, 천천히 오라고 하면 저유가 상황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배에 실린 원유를 매입할 때보다 유가가 오르고 있으면 그 가격 차이만큼 이윤이 커지고 매입가보다 유가가 내리면 반대이기 때문이다.
 
배의 최고 속도는 16노트(시속 29.6㎞)다. 빈 배로 우리나라에서 출발해 중동에서 기름을 싣고 돌아오는 ‘1항차’당 평균 50일가량 걸리지만 고유가 상황에선 이 기간이 40일 남짓으로 줄어든다. 강 선장은 “배의 경제 속도는 10~12노트(시속 18.5~22.2㎞)지만 급할 땐 16노트로 다닌다”며 “최고 속도로 다니면 하루에 벙커C유를 100t씩 쓰기도 한다”고 말했다.
 
유조선은 오늘의 한국 사회를 고스란히 반영하는 거울이기도 하다. 우선 고된 일을 꺼리는 젊은이가 늘면서 한국인 선원 채용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한국해양대학을 졸업한 젊은 해기사들은 의무 승선 기간인 3년이 지나면 대부분 육상 근무를 원하는 경우가 많다. 한 해의 절반가량을 바다 위에서 생활해야 하는 만큼 가정 생활과 연애 등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아서다.
 
빈자리는 외국인 선원들이 채우고 있다. C. 엠페러호도 23명의 선원 중 다섯 명이 외국인이다. 정보통신 강국답게 배에서도 와이파이가 터진다. 덕분에 뭍에 있는 가족들과 영상통화도 한결 수월해졌다. 과거엔 비용도 많이 들고 효율이 떨어지는 위성전화를 이용해 연락해야만 했다.
 
하지만 전자해도 표시시스템(ECDIS) 등 유조선 운용 관련 핵심 기술은 여전히 뒤쳐진다. 이 때문에 일본이나 유럽 등에서 만든 제품을 활용할 수밖에 없다. 원천기술이 약한 오늘날 국내 산업계의 고민과 맞닿아 있다.
 
 
원천기술 부족해도 지상 공정은 최상급
 
다만 원유를 들여온 이후 정제 등 지상에서 이뤄지는 공정은 세계 최정상급 수준을 자랑한다. 우리나라의 지난해 석유제품 수출은 325억 달러에 달한다. 플랜트 운용 능력도 마찬가지다. C. 엠페러호의 다음 행선지인 SK인천석유화학의 경우 전 세계적으로 드물게 원유를 비등점 차이에 따라 납사와 등유·경유 등으로 분류하는 상압증류공정(CDU)과 초경질원유(컨덴세이트)까지 분리할 수 있는 초경질원유분리공정(CSU)을 동시에 보유하고 있다. 덕분에 이 회사는 2016년부터 올해까지 누적 영업이익이 1조원에 달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반도체 제조 장비는 만들지 못해도 완제품인 반도체 하나로 우뚝 선 우리나라 전자업계와 닮았다.
 
유조선을 타면 한국의 발전상을 더욱 체감할 수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과거엔 중동 산유국들이 한국을 잘 몰랐지만 요즘은 일본보다 한국을 더 잘 안다고 한다. 역설적이지만 국내 유조선 업계에게 인천과 울산은 익숙하면서도 가장 항해가 어려운 구간이다. 항만 시설 등은 선진국 이상으로 잘 구비돼 있지만 이 지역을 오가는 배가 워낙 많다 보니 그만큼 교통 체증이 심하기 때문이다. C. 엠페러호는 이달 초 인천에서 하역을 모두 마친 뒤 다시 중동으로 향했다. 배는 8월께 다시 한국에 온다.
 
C.엠페러호 (C.Emperor)
● 건조연도: 2004년
● 전장(길이): 323m
● 전폭(폭): 60m
● 최대 적재량: 원유 200만 배럴
[자료: SK이노베이션]
 
울산=이수기 기자 lee.sook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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