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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일하지 않을 자유도 있다

중앙선데이 2018.06.23 01:00 589호 30면 지면보기
기본소득, 약인가 독인가
21세기 기본소득

21세기 기본소득

21세기 기본소득
필리프 판 파레이스·

왜 지금 기본소득이 뜨겁나
재산·직업 떠나 동일한 금액 지급
양극화·고실업 대안으로 떠올라

근로의욕 떨어뜨리지 않나
“나라 망치는 지름길” 비판 일어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어” 반론도

유토피아 만들 수 있다는데 …
사회주의·신자유주의 점진적 대체
“돈 걱정 없는 이상국가 건설” 주장

야니크 판데르보흐트 지음
홍기빈 옮김, 흐름출판
 
사람에게는 ‘뭔가 문제가 있다’고 느끼면 언젠가는 그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있다.
 
천인합일(天人合一)이나 천부인권(天賦人權) 운운하면서도 같은 사람인 노예·노비를 사고파는가 하면, 여성을 ‘이류 인간’ 취급하며 참정권을 보장하지 않았던 시대가 있었다.
 
21세기는 하늘만큼 소중한 인간의 번영이 배부른 소리처럼 느껴지는, 상당수 사람의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세기다. 고용 없는 성장과 고성장 시대의 종언에 심화하는 경제 양극화, 인공지능(AI)의 위협…. 미래에 일자리의 47%가 사라진다는 암울한 전망도 있다.
 
소비자가 구매력이 없으면 경제가 돌아가지 않는다. 현재의 복지국가 제도는 비효율적이다. 이대로 가면 부자·빈자가 공멸할 수도 있다. 참극을 막기 위해 최저임금 상승, ‘부자증세’ 등의 방안이 모색되고 있다.
 
그런 미봉책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며 기본소득을 근본적인 대안으로 제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쉽게 말하면 기본소득은 ‘누구에게나 조건 없이 정기적으로 동일한 액수의 현금을 주는 것’이다. 그 무엇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1인 1표를 구현한 보통선거(普通選擧)가 선거인에게 재산·신분·성별·교육 정도를 묻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기본소득과 보통선거는 논리적 구조가 닮은꼴이다.
 
스위스 헌법에 기본소득 조항을 넣어야 한다고 주장한 운동가들이 국민투표에 필요한 12만5000명의 서명을 확보하고 이를 기념해 2013년 10월 4일 베른에서 기본소득을 상징하는 동전을 쏟아붓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2016년 6월 5일 국민투표에서 76.9% 유권자들이 기본소득 도입에 반대했다. [사진 스테판 보러]

스위스 헌법에 기본소득 조항을 넣어야 한다고 주장한 운동가들이 국민투표에 필요한 12만5000명의 서명을 확보하고 이를 기념해 2013년 10월 4일 베른에서 기본소득을 상징하는 동전을 쏟아붓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2016년 6월 5일 국민투표에서 76.9% 유권자들이 기본소득 도입에 반대했다. [사진 스테판 보러]

대기업 총수이건 노숙자이건 국민·유권자는 누구나 한 표를 행사하듯, 기본소득은 누구에게나 ‘묻지마 공돈’을 주겠다는 구상이다. 귀찮게 각종 서류를 제출할 필요도 없고, ‘취업을 위해 노력했는지’를 묻는 공무원에게 시달릴 필요도 없다.
 
지지자들에게 기본소득은 거의 만병통치약이다. 그들 주장에 따르면 예컨대 기본소득이 보장되면, 월급을 좀 덜 받더라도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도 있다. 또 기본소득이 보장되면 창업이 수반하는 리스크를 걱정하지 않고 좀 더 홀가분한 마음으로 창업에 나설 수 있다.
 
『21세기 기본소득』은 현시점에서 기본소득에 대한 찬반양론과 오해와 진실, ‘가짜 뉴스’까지 총정리한 책이다. 주저자인 필리프 판 파레이스는 기본소득 운동의 철학적·이론적 선봉에 서 있는 인물이다.
 
저자가 중시하는 최고의 명분은 자유다. ‘형식적인 자유가 아닌 실질적 자유’다. 저자는 책의 제1장에서 기본소득이 왜 ‘자유를 위한 도구’인지를 다룬다. 저자는 ‘일할 자유’ 못지않게 ‘일하지 않을 자유’를 중시한다. 인류의 자유 대장정에서 기본소득은 마지막 프런티어인 것이다.
 
한글판 기준으로 643페이지다. 주석이 촘촘히 달렸다. 탁상공론이 아니다. 저자들은 현장을 찾아갔으며, 최고의 학자들이 수행한 실증연구를 인용한다.
 
저자들이 12년 동안 준비한 이 책은 기본소득의 쟁점을 총망라했다. 기본소득의 역사(3장, 4장)에서 윤리적 근거(5장), 재원조달 문제(6장), 정치적 문제(7장), 세계화라는 변수(8장)까지 모두 다뤘다. 적어도 반대파들이 기본소득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문을 떼는 것은 원천봉쇄하겠다는 의지가 읽히는 책이다.
 
저자들이 정리한 기본소득의 역사는 놀랍다. 늦어도 16세기에 기본소득의 맹아 아이디어가 싹텄다. 갑자기 생겨난 이론이 아니다. 또 이미 미국 알래스카·캐나다·핀란드·네덜란드·스위스·인도·멕시코·브라질·케냐·나미비아 등지에서 기본소득에 대해 진지한 논의와 다양한 실험이 실행되고 있다.
 
그만큼 지구촌을 단위로 하건, 민족국가를 단위로 하건 상황이 심각하다. 특히 경제 성장과 일자리 문제는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는 ‘콜럼버스의 달걀’이 발견될 때까지, 기본소득을 포함해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봐야 한다.
 
그렇다면 기본소득을 얼마나 보장해야 할까. 저자들은 사람들이 적어도 생존 걱정은 안 할 수 있도록 1인당 국내총생산(GDP)의 4분의 1을 주자고 주장한다. 미국의 경우엔 매달 1163달러(약 130만원), 우리나라 경우에는 매월 70만원이다.
 
각기 아주 다른 이유로 다양한 좌파·우파 세력이 기본소득에 찬성하거나 반대한다. 그들은 이렇게 묻는다. ‘공짜 돈은 사람들이 근로 의욕을 잃게 하는 것은 아닐까’,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돈으로 혁명적인 상황을 막아보려는 우파 기득권의 음모는 아닐까’, ‘노동조합 운동을 분열시키려는 꼼수가 있는 것은 아닐까’, ‘좌파 포퓰리즘이 제시하는 나라 망하게 하는 지름길은 아닐까’. 저자들은 이런 의구심을 하나하나 돌파한다.
 
사실 저자들은 ‘시장 독재’에 부정적인 좌파 이론가다. 어느 정도 좌편향됐다. 하지만 기본소득의 현대사에는 좌파·우파를 막론하고 의외의 지지자들이 등장한다. 이런 인물들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중 한명인 토머스 페인(1737~1809), 신자유주의에 사상적 기초를 제공한 보수주의의 아이콘 프리드리히 하이에크(1899~1992), 1976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밀턴 프리드먼(1912~2006), 199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아마르티아 센, 페이스북 설립자 마크 저커버그, 테슬라 최고경영자(CEO) 일론 머스크, 네오콘 싱크탱크인 미국기업연구원(AEI)의 연구원 찰스 머리, 미국 제37대 대통령 리처드 닉슨(1913~1994)…. 그들은 기본소득의 불가피성을 인식했다.
 
유토피아나 이상주의는 현실주의자들의 공격을 초래한다. 저자들은 굳이 자신들이 유토피아를 지향한다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저자들에게 기본소득이란 “사회주의와 신자유주의를 모두 근본적으로 대체할 수 있는 현실적 유토피아를 건설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다.
 
향후 기본소득 운동 행동계획의 핵심 전략은 뭘까. 저자들은 ‘마키아벨리의 현실주의적 사고로 유토피아를 달성하자’고 주장한다. 또 혁명과 같은 ‘한 방’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기본소득을 달성하자고 주창한다.
 
하버드대 출판부에서 출간한 이 책의 원제는 『기본소득: 자유로운 사회와 건강한 경제를 위한 근본적 제안(Basic Income: A Radical Proposal for a Free Society and a Sane Economy)』이다. 우리말 제목은 『21세기 기본소득: 자유로운 사회, 합리적인 경제를 향한 거대한 전환』이다. 우리말 제목에 덧붙인 ‘21세기’라는 수식어에는 토마 피케티 『21세기 자본』 못지않은 돌풍을 우리 출판계에서 일으켜보겠다는 출판사의 기대가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이 우리나라 일반 독서가, 정책결정자, 오피니언 리더 사이에서 임계질량(臨界質量, critical mass)을 확보할 경우, 섣불리 기본 소득을 논하다가 ‘무식하다’는 핀잔을 들을지도 모른다. 사실 박근혜 정부(2013~2017)시절인 2016년 4월 우리 국회입법조사처는 “한국도 기본소득 논의를 시작할 시점”이라고 밝힌 바 있다.
 
김환영 지식전문기자 whan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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