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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의대 절대평가 4년 … 학점 없애니 ‘협공’ 살아났다

중앙선데이 2018.06.23 00:02 589호 10면 지면보기
연세대 의대 졸업생 122명이 지난 2월 졸업식에서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고 있다. 4년간 상대평가가 아닌 절대평가로 과정을 마쳤다. [사진 연세대 의대]

연세대 의대 졸업생 122명이 지난 2월 졸업식에서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고 있다. 4년간 상대평가가 아닌 절대평가로 과정을 마쳤다. [사진 연세대 의대]

연세대 의대 본과 4학년 허성택(25)씨의 희망 전공은 이비인후과다. 뮤지컬이 좋아 가입한 인터넷 카페 동호인들과 지난해 11월 뮤지컬 공연을 한 뒤 결심을 굳혔다. “함께 공연했던 동료들은 의대 본과생이 주말 때 시간을 내 공연 준비에 참여하고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걸 알고 놀라워했다”며 “뮤지컬 준비 과정에서 성대에 문제가 생겨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보고 뭔가 도움이 되고 싶어 희망 전공을 정했다”고 말했다.
 

성적표엔 P(통과)·NP(통과 못함)
시험 족보 공유해 “함께 통과하자”

수업도 강의식에서 팀별 토론으로
연구·봉사 등 자발적 활동도 늘어

의사 국가고시 합격률 98% 기록
22일 성과 공유하는 심포지엄 열어

같은 학년 황지민(23)씨는 요즘 실습 교육 중에도 틈틈이 실험실을 찾아간다. 예과 2학년 때 정한 비만 관련 연구 테마를 학술 논문으로 발전시키려 한다. 황씨는 “의대 들어올 때부터 기초의학 연구 쪽에 관심이 많았다”고 했다.
 
본과 4학년이면 의사국가고시를 코 앞에 둔 시점이다. 시험 준비 외엔 다른 곳에 눈을 돌리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그런데 허씨와 황씨 모두 “연세대 의대 본과생들이 타 의대 학생들에 비해 마음에 한결 여유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들은 그 이유를 2014년 시작된 절대평가제도에서 찾았다.
 
연세대 의대의 절대평가란 성적(A·B·C·D·F)을 통과(Pass)·통과 못함(Non Pass, 줄여서 NP)으로 바꾼 것을 뜻한다. 성적표를 떼어도 등수나 학점은 없다. H(Honor, 최상위 수준)와 P, NP만 나온다.
 
연세대 의대 성적표(수정)

연세대 의대 성적표(수정)

 
등수 없앤 뒤 나타난 변화
 
한국의 모든 학생은 초등학교 졸업 후 중·고교 6년 간, 그리고 수능 시험에 이르기까지 상대평가와 등수에서 한발짝도 벗어날 수 없다. 대학에 와서도 ‘A+’에서 ‘F’로 매겨진 학점에 울고 웃는다. 하지만 연세대 의대는 본과1~4학년에 한해 상대평가·등수를 파괴했다. 김동석 교육부학장은 “의대생이 배워야 하는 모든 과목에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과 이 과목을 이수했을 때 무엇을 할 수 있게 되는지 역량을 정확하게 정해주고, 이것을 제대로 이수했는지 여부만을 확인하기로 평가 체제를 바꿨다”고 말했다. 대학 측은 이를 위해 4개 성과(훌륭한 의사·탁월한 의학자·효과적인 의사소통가·신뢰받는 전문가)와 36개 역량을 정했다. 예를 들어 훌륭한 의사라는 성과 중엔 ‘환자의 다양한 배경을 고려하고 적절한 면담 원칙을 사용해 병력을 청취할 수 있다’는 역량 등 13가지 역량이 들어가 있다.
 
올해 2월 졸업해 대부분 인턴을 밟고 있는 본과 졸업생들은 본과 1~4학년 동안 절대평가로 성적이 매겨진 첫 번째 학년이다.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인턴을 하고 있는 이동기(24)씨는 “1학년 때 등수를 안 매기고, 성적은 P 또는 NP로 바꾼다고 해서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며 “절대평가가 된 이후에도 해야 할 공부량이 줄지 않았지만 남을 밟고 반드시 더 좋은 점수를 따야 한다는 부담은 확실히 사라졌다”고 말했다.
 
본과 4학년 허씨는 절대평가 도입 이후 달라진 변화에 대해 “과거만 해도 친한 친구 끼리끼리 시험 족보를 몰래 나눴으나 절대평가 이후엔 ‘같이 보고 같이 통과하자’는 협력 분위기로 확연히 달라졌다”고 전했다. 이 대학 의대 학생회는 “학생들 사이에서 연구나 봉사 등 자발적 활동이 늘어난 것도 큰 변화”라고 평가했다. 학생이 교수와 함께 연구에 참여해 함께 쓴 국제학술지 논문수가 2014년 1건에서 2017년 17건으로 늘어난 것도 변화를 반영한다.
 
평가가 달라지자 대학 교수들의 강의도 바뀌었다. 절대평가 이전엔 수업이 대부분 교수가 강단에 서서 강의하는 강의형이었다. 하지만 절대평가 이후엔 강의와 토론이 결합되거나 플립러닝(flipped learning, 인터넷으로 사전 강의를 듣고 수업시간엔 팀별 토론 수업)이 가미된 형태가 늘어났다. 현재 본과 2학년 전체 강의의 26%를 차지한다. 이같은 절대평가 시행 4년 간의 성과는 22일 ‘의대 학생평가제도 혁신을 위한 심포지엄’에서 발표됐다.
 
 
발달시험으로 하향 평준화 막아
 
이 대학 교육과정평가 테스크포스팀은 지난 5월 제출한 보고서에서 “등수가 사라지면 학생들의 학업 동기가 낮아져 학업성취도가 떨어지지 않을까 우려했다”고 썼다. 하향 평준화에 대한 우려는 올해 1월 치러진 의사국가고시 성적에서 불식됐다. 이 대학의 응시생 131명의 합격률이 97.7%(전국 평균 95%), 재응시생을 제외한 합격생 120명의 필기시험 평균 점수(340점 만점)는 301.18점(전체 합격생 평균 286.3점)으로 발표됐다. 이에 대해 의학교육학교실 김혜원 기초연구 조교수는 “학생들은 본과 4년 간 총 12번 치르는 발달시험(Progress Test)을 치르면서 스스로 수준을 파악하고, 약점을 보완한 것이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발달시험은 기초의학이나 임상의학 전반에 관한 문항 150개로 구성돼 있는 일종의 진단평가다. 이 대학이 상대평가 적용을 받았던 2017년 졸업생과 절대평가제도였던 2018년 졸업생 사이의 기초의학과 임상의학 점수를 비교한 결과에서도 절대평가제 학생 성적이 낮지 않았다.
 
전국 41개 의과대 가운데 절대평가를 도입한 대학은 연세대 의대와 2년 늦게 도입한 인제대 의대다. 이들 대학을 졸업한 학생이 다른 대학 병원 인턴이나 레지던트를 지원할 땐 P와 NP 등이 적힌 성적표를 제출한다. 절대평가제도 취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병원은 이들의 성적 점수를 달라고 한다. 하지만 P라고 판정한 원점수는 학생 개인도 알 수 없게 돼 있다. 이 대학 권성준 교육파트장은 “학생과 교수가 본과 4년 간 상의하며 작성한 학생 개개인의 포트폴리오를 타 기관에 제공하는데 이걸 보고 제도의 취지를 이해한다”고 말했다.
 
강홍준 기자 kang.hong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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