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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란통 의대 시절 내 노트 빌린 남학생 "네 덕에 의사됐어"

중앙일보 2018.06.18 07:02 종합 19면 지면보기
[더,오래] 김길태의 91세 왕언니의 레슨(18)
전쟁을 겪으면서 많은 사람이 삶의 터전을 잃고 살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왔다. 부모를 따라 대학생들도 많이 왔다. 이들 학생을 모아 학교를 시작한 것이 전시연합대학이다.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전경. [중앙포토]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전경. [중앙포토]

 
그때는 남녀공학이 없었다. 모교인 서울여자의과대학(고려대 의과대학의 전신)의 학생들과 서울대 의과대학생들이 모여 공부를 시작한 것이 남녀공학이 됐다. 여학생과 남학생이 같이 있거나 손만 잡아도 화제가 됐다. 그런데 남녀공학이라니 전시이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때 부모들의 보수적인 생각은 기우라는 것을 알았다.
 
남녀가 함께 같은 자리에 앉아 공부한다 해도 이성에 대한 감정이 전혀 일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남녀 사이에도 친구는 친구다. 개인적인 사랑이 싹트지 않는 한 친구다. 남자 친구는 여자 친구보다 선이 굵고 마음이 넓으며 아는 것이 좀 더 많은 것 같았다.


남녀 인체구조 다루는 강의 같이 들어
나는 남학생을 좋아했다. 가까이 앉아 이야기도 하고 폭넓은 토론도 하며 얻는 것이 여자 친구보다 더 많은 것 같았다. 의과대학에선 남자와 여자의 인체구조를 다루는데 그에 따라 병도 달라 거북한 강의가 많았다. 그것마저 아무렇지 않게 같이 들을 수 있으니 이성이 아님이 분명했다.
 
그때 나는 몇몇 친구가 있었다. 그중 피난생활이 어려워져 고학해야 하는 친구가 있었다. 전쟁 때라 책이 없었다. 교수가 칠판에 열심히 쓰면서 가르치고, 우리는 또 열심히 받아쓰면서 그 어려운 공부를 해야만 했다. 그러기에 공부 자체도 어렵지만 결석을 하면 공부는 더 힘들었다.
 
나는 철자법이 엉망인 내 노트를 부끄러움 없이 친구에게 빌려줬다. [중앙포토]

나는 철자법이 엉망인 내 노트를 부끄러움 없이 친구에게 빌려줬다. [중앙포토]

 
어느 날 그 친구가 내 노트를 빌려달라고 했다. 나는 철자법이 엉망인 내 노트를 부끄러움 없이 빌려줬다. 철자법은 엉망이지만 내용만큼은 정확했기에 그 애와 나는 재시험 없이 졸업했고, 의사국가시험도 무난히 통과했으니 다행이었다.
 
우리는 일제 때 일본어만 배웠다. 해방됐을 때도 한글 철자법과 문법이 정립되지 않았다. 선생님들도 과거의 철자법으로 우리를 가르쳤다. 더욱이 경상도라 사투리가 심했다. 그 노트에는 그것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그 후 나는 부산에 의과대학이 없어 대구의 경북대 의과대학 병원에 인턴으로 갔다. 그 애는 내가 어디로 갔는지 모르고 있었다. 모든 일이 옛이야기로 됐을 때 그 친구가 서울 충무로에 큰 외과병원을 개원해 원장으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우연히 딸아이와 같이 그의 병원에 갔을 때 그 친구를 만났다. 깜짝 놀랐고 또 반갑기도 했다. 그 시절 나를 많이 찾았다고 하며 “그때 어디 있었느냐?”고 했다. 내가 “대구로 갔으니 부산에서 못 찾은 것이었다”고 했다. 그 친구는 학창시절 이야기를 하며 “정말 고마웠다. 네 덕택에 의사가 될 수 있었다”고 인사를 했다. 철자법이 엉망인 그 노트 생각이 나서 쑥스러워 “엉망진창인 노트였는데, 뭐” 하며 웃었다. 창피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김길태 산부인과 의사 heesunp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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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태 김길태 산부인과 의사 필진

[김길태의 91세 왕언니의 레슨] 90세에 새 삶을 찾아 나선 대한민국 1세대 여의사. 85세까지 직접 운전하며 병원을 출퇴근했다. 88세까지 진료하다 노인성 질환으로 활동이 힘들어지자 글쓰기에 도전, ‘90세의 꿈’이라는 책을 출판하고 문인으로 등단했다. 근 100년 동안 한국의 역사만큼이나 굴곡진 인생을 살면서 웃음과 꿈을 잃지 않고 열정적으로 삶에 도전해 온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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