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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중앙일보 2018.06.16 07:00
[더,오래] 현예슬의 만만한 리뷰(36)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하세요]
 
1942년 영국의 자유주의 경제학자 윌리엄 베버리지가 쓴 보고서를 보면 ‘요람에서 무덤까지(from the cradle to the grave)’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사람이 태어나면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전 생애를 국가가 책임진다는 말인데요. 복지에 대해선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 문장이라면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얼핏 보면 모든 걸 국가가 책임져 주니 편하겠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면 정말 무서운 말입니다. 책임에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니까요. 오늘은 최고의 복지국가라 손꼽는 나라 ‘영국’의 복지 정책을 꼬집는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소개합니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다니엘 역을 맡은 데이브 존스. 극중 다니엘은 질병 수당에 문제가 있어 고객센터에 전화하지만 연결에만 1시간 48분이 걸린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다니엘 역을 맡은 데이브 존스. 극중 다니엘은 질병 수당에 문제가 있어 고객센터에 전화하지만 연결에만 1시간 48분이 걸린다.

 
평생을 목수로 성실하게 일해온 다니엘은 지병인 심장병으로 인해 병원 주치의로부터 일을 계속하는 건 위험하다는 말을 듣습니다. 졸지에 실업자가 된 다니엘은 질병 수당을 받기 위해 의료 전문가의 진단을 받는데요. 일은 여기서부터 벌어집니다.
 
다니엘은 자신이 일할 수 없는 몸 상태임을 증명하려 하지만 의료 전문가는 정해진 질문만 늘어놓죠. 예를 들면 전화번호를 누르는 데 문제가 없는지 또는 자명종 시계를 맞추는 데 문제는 없는지 등의 질문을 하고 있으니 다니엘의 입장에선 답답할 노릇입니다.
 
언제 어느 때 갑자기 쓰러질지 모르는 상태를 제외하면 다니엘은 (전화번호를 누르는 데는) 사지 멀쩡한 상태였기 때문에 결국 질병 수당 대상자에 포함되지 못하죠. 항고를 위해 찾아간 센터에서 안내 직원이 하는 말은 더 가관입니다.


일할 여건이 되면 구직 수당, 환자면 질병 수당을 신청하라.
-질병 수당 신청에서 떨어졌다.
그럼 구직 수당을 신청하라. 아니면 질병 수당 탈락 판정에 항고하라.
-구직 수당 신청 양식과 항고 신청 양식을 받을 수 있냐.
인터넷으로 신청해야 한다. 전화 도우미를 이용하라.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케이티 역을 맡은 헤일리 스콰이어. 케이티 가족은 생계 수당을 위해 센터를 찾았지만 상담 시간에 늦었다는 이유로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케이티 역을 맡은 헤일리 스콰이어. 케이티 가족은 생계 수당을 위해 센터를 찾았지만 상담 시간에 늦었다는 이유로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케이티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미혼모 케이티는 두 아이와 함께 생계보조수당을 위해 센터를 찾습니다. 하지만 이사 와 길 찾기가 어려웠던 케이티는 상담 시간에 늦었고 이 때문에 기회조차 얻지 못했습니다. 인정이라곤 1도 없는 센터에서 화가 난 다니엘은 뒷사람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녀를 먼저 배려해주려고 하지만 직원들에 의해 쫓겨나죠.
 
저는 이 장면을 보며 센터 직원들이 마치 로봇처럼 느껴졌습니다. 주어진 명령어에 대해서만 답하기 때문인데요. 이들이 만들어놓은 매뉴얼은 관리자 입장에서 보면 편할 겁니다. 하지만 그들이 정한 범위 안에 들지 못한 나머지 사람은 무시해도 괜찮은지 되묻고 싶습니다.
 
다니엘은 그들이 시키는대로 도서관에서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인터넷이라는 것에 접근을 해보려고 시도하고, 그들이 원하는 구직 활동도 하죠. 하지만 그들의 메뉴얼대로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해버립니다. 이쯤 되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국가라는 게 사람의 생존권을 가지고 장난치고 있구나.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식료품 지원소였습니다. 다니엘은 케이티 식구들을 식료품 지원소에 데려가는데요. 각종 생활용품과 식재료를 지원해주는 그곳에서 케이티는 갑자기 이성을 잃고 파스타 소스 캔을 따 허겁지겁 마십니다. 자원봉사자가 다가와 "괜찮냐"는 물음에 그제야 자신이 무슨 행동을 했는지 깨달은 케이티는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트립니다. "죄송해요, 너무 배고파서 그만…"
 
케이티가 식료품 지원소에서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파스타 소스를 마신 후 자괴감에 울음을 터트리는 장면.

케이티가 식료품 지원소에서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파스타 소스를 마신 후 자괴감에 울음을 터트리는 장면.

 
아이들과 다니엘에게 식사를 양보한 후 자신은 늘 먹고 왔다는 말로 대신하던 케이티가 한순간에 무너져내리는 장면이었습니다. 이 장면은 실제로 운영하는 식료품 지원소에서 찍은 장면이라고 하는데요. 배우들만 그 상황이 설정이란 것을 알뿐 영화에 나오는 자원봉사자들은 실제 자원봉사자들이었다고 합니다. 자원봉사자들이 케이티와 아이들, 다니엘에게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래도 아직은 저런 사람들이 있어 다행이다'라는 안도감을 느낍니다. 
 
이런 지원에도 케이티는 (지원 품목이 아니었던) 생리대가 없어 마트에서 몰래 훔치다 걸리기도 하고 급기야는 매춘을 선택합니다. 국가의 보호를 받아야 할 그들이 도리어 국가에 의해 무너저 내리는 모습을 보면서 관객들은 복지정책에 대한 모순을 느끼실겁니다. 
 
한편 다니엘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모두 통하지 않자 모든 권리를 포기합니다. 자신이 누려야 했던 당연한 권리를요. 그리고 밖으로 나와 센터 벽면에 글을 남기죠.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굶어 죽기 전에 항고일 배정을 요구한다. 상담 전화의 구린 대기음도 바꿔라.”
아이러니하게도 글을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에게 박수를 쳐 줍니다. 물론 센터의 직원들은 제외하고요.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센터의 벽면에 글을 쓴 다니엘. 지나가던 사람이 다니엘에게 환호하고 있다.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센터의 벽면에 글을 쓴 다니엘. 지나가던 사람이 다니엘에게 환호하고 있다.

 
직원의 신고로 경찰서로 연행된 다니엘은 훈방조치가 되고, 이후 꼼짝 않고 집에서만 지내던 그에게 케이티 가족은 그가 그랬듯 손을 내밉니다. 마침내 잡힌 항고일 배정 재판을 위해 변호사를 만나러 간 케이티와 다니엘은 재판에 이길 수 있다는 변호사의 말에 희망을 얻습니다. 하지만 그날 다니엘은 지병으로 인해 돌연 사망하게 되죠.
 
결국 재판에서 다니엘이 하려던 말은 그의 장례식에서 케이티가 대신 하게 됩니다. 그가 느꼈던 절망이 고스란히 글에 담겨 있어 있습니다.
"(중략)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를 개로 만든 건 무엇일까요?  
 
나, 다니엘 블레이크
'나, 다니엘 블레이크' 메인 포스터.

'나, 다니엘 블레이크' 메인 포스터.

감독: 켄 로치
각본: 폴 래버티
출연: 데이브 존스, 헤일리 스콰이어
촬영: 로비 라이언
음악: 조지 펜튼
장르: 드라마
상영시간: 100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일: 2016년 12월 8일
 
현예슬 hyeon.yeseu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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