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북유럽 스타일 말고 동아시아의 보물 이야기, 궁금하지 않으세요?”

중앙선데이 2018.06.16 02:00 588호 24면 지면보기
아시아 공예품 집합소, 서울번드 박찬호 대표
서울 서초동 남부터미널 인근, 진열 상품이 거의 없는 쇼룸 하나가 들어섰다. 쇼룸에 놓인 것은 스툴 하나와 조그만 자개 상이 전부였다. 한국ㆍ일본ㆍ중국ㆍ대만ㆍ홍콩 등 동아시아 5개국의 공예품 600가지를 수집해 판다는 ‘서울번드(SEOUL BUNDㆍ서울 부두)’의 쇼룸이다. 판매 제품의 가짓수가 많아 다 진열하지 못하더라도, 통상 쇼룸에 가면 베스트셀러 제품 정도는 진열해 놓기 마련인데 이 회사의 박찬호(27ㆍ사진 왼쪽) 대표는 전혀 다른 방식을 택했다. “보물 하나마다 담긴 이야기가 너무 많아 이를 몽땅 펼칠 수 있는 온라인에 집중하기로 했어요.” 이야기를 충분히 전달하지 못했거나, 되려 방문객이 불편해 하는 경우를 겪고 나서 내린 조치라고 했다. 그릇 하나, 수저 하나에 담긴 이야기가 뭐 그리 많을까. 북유럽 스타일이 트렌드가 되어 국내 리빙 시장을 강타하던 2015년, 동아시아 보물의 가치를 알리겠다며 나선 이 청년 보부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나 보다.  

 
이를 테면 박 대표가 대만 리빙 브랜드 ‘지아’의 찜기인 스티머를 설명할 때다. 몇천 년 전 한나라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찜기의 원리와 효과, 사용법까지 풀어낸다. “한신 장군이 대나무와 나무로 조리도구를 만들고 증기를 이용해 요리한 것이 시초입니다. 음식을 찌는 방법은 중국요리에서 필수적인 기법으로 발전됐어요. 스티머의 바스켓은 삼나무고 그 받침은 테라코타인데, 테라코타는 수분을 흡수하는데 아주 효과적입니다. 음식을 찔 때 나오는 과도한 수분을 흡수하고, 음식을 완벽할 정도로 촉촉하게 만들어줍니다 .”  
 
서울번드는 지난 3월 열린 서울리빙디자인페어에 참가해 ‘눈에 띄는 공간상’을 수상했다.

서울번드는 지난 3월 열린 서울리빙디자인페어에 참가해 ‘눈에 띄는 공간상’을 수상했다.

사기 그릇에 삼나무 바스켓이 올려져 있어, 수프를 만들며 채소 찜도 동시에 할 수 있는 스티머는 서울번드의 베스트셀러 제품이다. 서울번드가 국내에서 독점 판매하는 지아의 제품은 박 대표가 중국 상하이에서 하루 종일 걷다가 발견했다고 한다. “어느 몰에 갔다가 도자기가 쫙 진열되어 있는 중에 하나를 발견했어요. 중국적이지 않으면서 중국적인 느낌이라 눈에 확 들어와서 추적에 들어갔죠. 알고 보니 대만 브랜드였고, 물어 물어 연락해 대만으로 가서 계약했습니다. 무조건 많이 걷고, 구석구석 가보는 게 제 일이에요. 백화점도 가지만, 재밌는 것은 백화점 밖에 있어요. 현지인도 잘 모르는 브랜드도 많습니다.”  
서울리빙디자인페어 부스 에서 키네틱 아티스트 정원석 작가와 협업해 대만의 도자회 사 쓰리코의 티팟을 악기처럼 연주했다.

서울리빙디자인페어 부스 에서 키네틱 아티스트 정원석 작가와 협업해 대만의 도자회 사 쓰리코의 티팟을 악기처럼 연주했다.

 
박 대표는 무역업에 종사하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초ㆍ중ㆍ고교 시절을 상하이에서 보냈다. 홍익대에서 가구 디자인으로 대학 공부를 시작했지만, “현재 제적 상태”라고 그는 말했다. 생산자보다 기획자로 일하는 게 재밌어 서울번드를 론칭하면서다.  
 
“대학 다니면서 한국이나 아시아의 디자인사를 배워본 적이 없어요. 유럽사에 근간에 뒀죠. 해외를 많이 돌아다녔는데, 그때마다 ‘한국에는 뭐가 있느냐’고 묻는 질문에 답할 말이 없었어요. 문화 식민지가 된 느낌이랄까. 한국만으로 이야기하기보다, 북유럽 스타일처럼 한자 문화권으로 묶어 보자 싶었어요. 그래서 한국ㆍ중국ㆍ일본ㆍ대만ㆍ홍콩 등 동아시아 5개국의 보물로 추려냈죠.”  
 
발품 팔아 발굴하는 동아시아 5개국의 보물들
대만 리빙 브랜드 ‘지아’의 찜기 스티머

대만 리빙 브랜드 ‘지아’의 찜기 스티머

박 대표는 늘 출장 중이다. 보물 발굴을 위해 동아시아 국가 어딘가에서 걷는 게 그의 일이다. ‘감’에 의존하던 일은, 어느새 51개 기준표를 만들 정도가 됐다. 홍콩 생활용품 브랜드 ‘라티튜드 22엔’의 경우 대만 디자인 전시장에서 만났다. 중국 청화기법을 현대적으로 풀어낸 스타일이 놀라워 추적해보니 2008년 설립한 홍콩 디자인 브랜드였다. 미키 마우스의 동그란 얼굴과 귀를 연상시키는 일본 미야마의 ‘사보네 시리즈’, 도자 표면에 유약 처리를 하지 않고 흙에 염료를 섞어 굽는 대만의 도자 브랜드 쓰리코의 그릇들도 모두 그가 발품으로 건진 결과물이다.  
지아의 끼니세트. 대나무 뚜껑으로 보온 효과를 높였다.

지아의 끼니세트. 대나무 뚜껑으로 보온 효과를 높였다.

 
취급하는 제품들은 어딘가 익숙한데 기성제품과 비교해보면 조금씩 낯설었다. 값도 꽤 나갔다.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한 설명이 필요했다. 온라인 몰에서 사진을 여럿 올리고 역사부터 사용법까지 스토리텔링을 하는 이유였다. 매장에서는 보고 싶은 제품을 예약하면 볼 수 있게 운영하기로 했다는 그의 말이 비로소 설득력이 있었다.  
 
서울번드에서는 한국의 전통 제품을 디자이너·장인과 협업해 현대식으로 제작하는 일도 하고 있다. 유기 양식 커트러리가 대표적이다.  
 
‘서울번드 화’의 유기 커트러리와 월반 트레이, 아리타재팬의 식기들

‘서울번드 화’의 유기 커트러리와 월반 트레이, 아리타재팬의 식기들

“동아시아 국가 중 유일하게 한국이 유기 제품을 만들어 쓰는데, 제품 자체가 워낙 가치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주변에 권하니 색깔 변하고, 무겁고, 불편하고 이른바 할머니 식기라는 고정관념이 너무 컸어요. 그래서 기존에 쓰던 유기 제품이 아닌 다른 형태로 만들어야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게 유기 커트러리 브랜드 ‘라륀’입니다. 송승용 디자이너와 함께 디자인해, 이종오 유기 명장이 제작했죠. 이런 콜라보레이션 제품은 ‘서울번드 화(和)’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일본 미야마의 사보네 그릇에 바둑돌을 담은 이미지 컷

일본 미야마의 사보네 그릇에 바둑돌을 담은 이미지 컷

전통 소반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소반 트레이’의 탄생기도 비슷하다. 디자인 가구 스튜디오 ‘컨테이너 5-1’과 협업해 만든 제품은 탁자에 올려놓고 쓸 수 있게 소반의 높이를 낮췄다. 입식 생활에 맞춰, 약간 높이가 있는 쟁반 느낌으로 쓰게끔 고안했다. 그에게는 이렇게 현대식으로 번안하고픈 전통 제품이 많아 보였다.  
 
‘서울번드 화’의 유기 커트러리와 월 반 트레이

‘서울번드 화’의 유기 커트러리와 월 반 트레이

“옹기 제품을 현대식으로 어떻게 만들까도 고민하고 있어요. 옻칠 목기 제품도 정말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려워요. 제사상에나 쓰는 거라고 많이 생각하니까요. 그런데 제 눈에는 참 멋져 보이거든요. 모티브는 전통에서 가져오되, 현대인이 쓸 수 있는 제품을 만들고 싶어요.” 진흙 속에 묻힌, 원석 같은 동아시아의 보물 찾기에 열중한 젊은 보부상의 목소리에 신명이 묻어났다. ●
 
글 한은화 기자 onhwa@joongang.co.kr  사진 신인섭 기자·서울번드  
 

구독신청

공유하기
Innovation Lab
Branded Content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