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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트럼프, 한·미동맹 뒤로하고 ‘김정은식 모델’ 산 셈

중앙일보 2018.06.14 01:51 종합 8면 지면보기
“우리는 그것을 중단함으로써 많은 돈을 절약할 것이다. 그에 더해 나는 그것이 매우 도발적(provocative)이라고 생각한다.”
 
12일 싱가포르 센토사섬의 카펠라 호텔. 북·미 정상회담 결과를 설명하는 기자회견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발언을 듣고 귀를 의심했다. 그가 언급한 ‘그것’은 한·미 연합훈련이었기 때문이다. “연합훈련을 중단하겠다는 뜻이냐”는 추가 질문에 트럼프 대통령은 “그렇다”면서 또 “그것은 매우 도발적”이라고 했다. 연합훈련을 전쟁놀음(war games)이라고도 표현했다.
 
지난해 8월 스위스에서 열린 유엔 제네바 군축회의(CD)에서 로버트 우드 미국 군축대사는 북한의 핵·미사일 실험과 한·미 군사훈련을 동시에 중단하자는 중국의 쌍중단 제안을 일축했다. 그는 “수년 동안 진행한 합법적·방어적 훈련과 유엔 안보리 결의 위반 행위는 등가성이 맞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이건 우드 대사만 아니라 그간 백악관·국방부·국무부 관료들이 일관되게 해온 얘기다. 그런데 미국 대통령이 하루아침에 한·미 동맹의 합법적·방어적 훈련을 도발적 전쟁놀음으로 규정한 게 됐다.
 
북한 주민들이 13일 평양 지하철역에서 노동신문에 실린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정상회담 관련 기사를 살펴보고 있다. [교도=연합뉴스]

북한 주민들이 13일 평양 지하철역에서 노동신문에 실린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정상회담 관련 기사를 살펴보고 있다. [교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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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배경은 13일 북한 조선중앙통신 보도를 보니 이해가 갔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상대방을 적대시하는 군사행동 중지 용단을 요청했고 트럼프 대통령이 조·미(북·미) 대화 진행 중에는 조선이 도발로 간주하는 미-남조선 합동군사연습을 중지하며…”라고 돼 있었다.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의 중단 요청을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한·미 연합훈련이 도발이라는 북한 주장에 동조까지 한 셈이다.
 
기대를 모았던 ‘트럼프식 비핵화 모델’도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는 격이다. 공동성명엔 미국이 양보 불가라고 했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CVID)’ 중 V(검증)와 I(불가역성)가 빠졌다. 트럼프 대통령의 설명을 요약하면 V와 I는 시간이 없어서 못 넣었고, 일단 비핵화 조치를 시작하면 시작이 반으로 봐야 하고, 북한의 진정성은 자신이 최고의 협상가이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안다는 취지였다.
 
이번 회담을 통해 부각되는 건 오히려 ‘김정은식 모델’이다. 조선중앙통신은 “(트럼프 대통령이) 관계 개선 진척에 따라 제재를 해제할 수 있다는 의향을 표명했다”고 했다. 제재 해제의 전제조건이 ‘북한의 비핵화 조치’에서 ‘북·미 관계 개선의 정도’로 슬쩍 바뀌었다. 물론 이번 북·미 합의엔 성과가 있다. 북한은 새로운 북·미 관계 수립이라는 선물을 받았고, 이는 ‘도발이 아니라 대화를 하면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긍정적 강화로 이어질 수 있다. 김정은이 약속한 미사일 시험장 폐기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국내적으로 알릴 성과다. 전사자 유해 송환도 마찬가지다. 한국으로서는 남북 간 판문점 선언이 북·미 합의에 명기돼 북·미 정상회담의 길잡이 역할을 하겠다는 목표를 상당 부분 달성했다.
 
그럼에도 당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한·미 동맹으로 값을 치르고 김정은식 모델을 산 것처럼 보이는 게 사실이다. 한·미 연합 방위력을 체제 불안의 원인으로 간주하는 김정은과 방위비용에 불만이 있는 트럼프 대통령 간에 뜻이 맞은 결과가 한·미 동맹 약화로 가는 듯한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카펠라 호텔에서 회견을 하면서 자신이 아는 백악관 출입기자들만 이름과 매체명을 부르며 지명해 질문권을 줬다. 한·미 동맹에 직결되는 내용을 알리면서도 한국 기자들에겐 충분한 질문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한 시간 남짓 동안 총 103개의 질문이 쏟아졌는데 이 중 질문 기회를 얻은 한국 기자는 두 명에 불과했다. 그나마 막판에 한 한국 기자가 “South Korea!”라고 소리를 지르자 트럼프 대통령은 “그래, 한국 기자가 질문할 자격이 있다”며 지명했다. 
 
싱가포르=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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