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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구하며 논했던 동경대학 학생들이 쓴 화장실 낙서

중앙일보 2018.06.11 07:03
[더,오래] 김길태의 91세 왕언니의 레슨(17)
서울에서 공부하며 한글도 쓰기가 서툰데 영어·불어·독일어·라틴어·중국어를 한꺼번에 배웠다. [중앙포토]

서울에서 공부하며 한글도 쓰기가 서툰데 영어·불어·독일어·라틴어·중국어를 한꺼번에 배웠다. [중앙포토]

 
부모님 곁을 떠나 혼자 서울에서 하숙생활을 하고 계단식 교실에서 공부하니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우리나라가 독립하고 1년 후라 한글도 쓰기가 서툰데 영어·불어·독일어·라틴어·중국어를 한꺼번에 배우니 어리벙벙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열심히 공부했지만 지금 머리에 남아있는 것은 단어 몇 마디와 발음으로 어느 나라의 말인지를 구별하는 정도다.
 
영어로 쓰인 쉬운 책 한권을 아직도 읽지 못한다. 의학 용어가 들어있는 의서를 겨우 넘겨볼 정도다. 참 한심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말은 못 하는 것 없어 소설·산문·시도 읽고 미스터리한 소설도 읽고 했으니 나는 역시 한국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다.
 
예과 시절 기억에 남는 선생님의 이야기와 노래가 있다. 그 시절에는 서울의과대학교 교수님이 우리 학교에 와서 겸임교수로 있었다. 그때는 서울의과대학이 남녀공학이 아니었다. 철학을 가르쳤던 김태길 교수, 음악을 가르쳤던 박태준 교수는 우리 때 유명한 교수였다.
 
일본 동경대학 화장실 벽에 쓰인 낙서  
김태길 교수가 일본 동경대학에 다녔을 때 화장실 벽에 학생들이 쓴 글 이야기를 우리에게 해주셨다. ‘사랑이 없으면 어떻게 하나/사랑이 없음을 어떻게 하나/ 사랑은 있다 주라’라는 글인데, 한 줄 한 줄 쓴 사람이 다르다고 했다.
 
‘사랑이 없으면 어떻게 하나’라는 첫 줄 학생은 사랑할 수 있는 여인을 찾지 못해 고민 중인 자기의 기막힌 심정을 썼다. 둘째 줄 학생이 그 글귀를 보고 자기가 구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고 괴로움의 근원이 된 시련이었으니 ‘사랑이 없음을 어떻게 하나’라고 썼다.
 
아직도 사랑을 찾고 있는 순진한 셋째 줄 학생이 쓴 글이 ‘사랑은 있다 주라’이니 자기의 사랑을 누구에게 주고 싶은 마음을 쓰지 않았을까 내 나름대로 생각해본다.
 
그 시절에도 대학생들이 사랑을 구하며 사랑을 논했고 그것을 화장실 벽에 쓸 젊음이 있어서 부러웠다. 얼마나 멋있는 이야기냐 말이다. 나도 대학생 때라 교수님의 이야기가 가슴에 와 닿아서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있다.
 
친구가 결혼한다기에 진주로 갔다. 친구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됐다며 마음 아파하고 있었다. 남편 될 사람이 6·25사변 때 죽은 친구의 애인이었다고 했다. 나는 신랑이 있는 방에 가서 이 글의 이야기를 하고 내 친구를 사랑해 달라고 부탁했다. 진심으로 서로 사랑하면서 살기를 빌면서.
 
친구들 결혼 때마다 축가로 불러주는 '동무생각' 
 
박태준 교수님이 가르쳐주신 노래 중 하나가 있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 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 나리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 언덕과 같은 내 마음에/ 백합 같은 내 친구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근심이 사라진다’ (박태준 작곡, 이은상 작사, ‘동무생각’)
 
나는 이 노래를 정말 좋아했기에 지금도 가끔 혼자서 부른다. 사랑하는 친구를 생각하면서. 나는 친구들을 좋아한다. 그 친구들이 결혼할 때 축가로 가끔 이 노래를 불러줬다.
 
김길태 산부인과 의사 heesunp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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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태 김길태 산부인과 의사 필진

[김길태의 91세 왕언니의 레슨] 90세에 새 삶을 찾아 나선 대한민국 1세대 여의사. 85세까지 직접 운전하며 병원을 출퇴근했다. 88세까지 진료하다 노인성 질환으로 활동이 힘들어지자 글쓰기에 도전, ‘90세의 꿈’이라는 책을 출판하고 문인으로 등단했다. 근 100년 동안 한국의 역사만큼이나 굴곡진 인생을 살면서 웃음과 꿈을 잃지 않고 열정적으로 삶에 도전해 온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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