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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리나요? 북한산 계곡 물이 내는 그리움의 소리

중앙일보 2018.06.07 07:00 종합 18면 지면보기
[더,오래] 윤경재 나도 시인(10)
 
물소리는 그리움
 
물이 껍질을 벗을 때
투명 속살을 훔쳐본
숨은 벽들이 놀라 메아리친다
물이 순하지만은 않구나
 
세찬 물소리는 그리움의 거리
바위가 얼마나 단단한지
조약돌이 얼마나 둥근지
이끼는 그렇게 부드러운지
모든 뿌리와 달빛
가재와 송사리를 품으며
물은 제 살갗마저 비비며 외친다
 
계곡도 벼랑도 훌쩍 넘어서는
마주침으로
먹먹한 가슴을 돌아보게 한다
 
살아있음은 그리움이다
그리움은 앞으로 가는 바퀴이다
 
[해설] 희망이 샘솟는 북한산 계곡 물소리
북한산. [사진 윤경재]

북한산. [사진 윤경재]

 
서울은 여러 가지로 축복받은 도시이다. 수량이 풍부한 한강을 품고 있으며 높은 산, 깊은 계곡이 둘러싸고 있다. 북한산은 그중에 압권이다. 북한산국립공원은 면적이 서울시의 7분의 1 정도나 되어 허파 노릇을 단단히 한다. 주봉인 백운대를 중심으로 숱한 봉우리와 계곡이 휴일이면 많은 시민을 맞는다. 나도 틈나는 대로 북한산에 오른다. 북한산과 도봉산은 들머리가 다양해 모든 길을 섭렵하려면 십여 년은 걸릴 거다.
 
봄비가 넉넉히 내린 다음 날 모처럼 북한산에 올랐다. 북한동 계곡에 엄청난 물이 쏟아져 내린다. 흰 포말을 허공에 터뜨리며 귀가 먹먹할 정도로 큰 소리가 온 산을 덮었다. 그 물소리의 위용에 내 발걸음은 멈추고 말았다. 거기서 나는 상념에 빠졌다.
 
인간이 외부에서 오는 자극을 느끼는 감각기관은 다섯 개다. 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이다. 각 감각에는 특징과 차이가 있다. 다섯 감각은 받아들이는 거리에서 차이가 난다. 시각이 가장 길고 광범위하다. 살갗이 느끼는 촉각이 가장 짧다. 그래서 느낌의 거리가 짧은 미각과 촉각은 인간이 스스로 자기라고 느끼는 범위에 속한다.
 
미각과 촉각이 ‘자아의 거리’라면 감각반경이 조금 먼 후각은 타자를 받아들이는 경계선이 된다. 그래서 좋은 향기는 받아들이기 쉽고 나쁜 향기는 배척하게 된다. 타자를 의식하게 되는 저항선이 향기라는 말이다. 외국 여행을 나가보면 타향이라고 느끼는 첫 번째 자각이 거리와 음식 등에서 나는 특유한 냄새다. 아마 타지에서 느끼는 향수병도 고향 냄새가 그리워 생기는 게 아닐까 한다. 그래서 향기는 ‘사랑의 거리’가 된다.
 
소리는 ‘그리움의 거리’
단독으로 나는 법이 없는 소리는 '소통'이다. [사진 freepik]

단독으로 나는 법이 없는 소리는 '소통'이다. [사진 freepik]

 
청각은 선택적이다. 귀는 밖에서 들어오는 소리 중에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챙겨 듣는다. 전철 안에서 친구와 대화할 때 실제 우리 귀에는 다른 소리가 모두 들려도 듣지 못한다. 쇠바퀴가 덜컹대는 소리, 발소리, 안내방송 소리, 잡상인 소리 등등 온갖 소리가 귀를 울려도 우리는 막상 인식하지 않는다. 친구와 대화에만 몰두한다. 그러다가 내게 영향을 주는 소리가 들리면 바로 그 소리에 집중하게 된다. 내릴 정거장 안내라든가 그날의 뉴스 등 관심이 가는 내용이 들리면 우리는 친구의 말소리보다 거기에 귀를 쫑긋 세운다.
 
이처럼 소리는 집중과 이완을 통해 시공간을 자유롭게 왕래하는 특징이 있다. 영화나 드라마에 배경음악과 음향이 끼치는 영향은 매우 크다. 배경음악을 통해 우리는 화면 너머로 상상의 나래를 편다. 등장인물의 미세한 심리변화를 느낄 수 있다. 대개 성공하고 잘 만들었다고 칭찬받는 영화나 드라마는 주제음악도 탁월하다. 그래서 나는 소리를 ‘연상의 거리’ ‘그리움의 거리’라고 부른다.
 
시각은 눈을 감지 않는 이상 외부정보가 무차별적으로 들어온다. 시각정보는 인간이 받아들이는 정보에서 90% 이상을 차지한다. 시각의 첫 번째 역할은 이런 정보 속에서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기능이다. 그래서 나는 시각을 ‘가늠의 거리’라고 이름 짓겠다.
 
여럿이 음식을 나누고 입맞춤하며 손잡고 포옹하는 미각과 촉각은 자아를 여닫는 일이니 ‘갈등과 화해의 거리’라고 부르겠다.
 
모든 소리는 단독으로 나는 법이 없다. 무엇인가와 마주치고 부딪혀야 비로소 소리가 난다. 타자가 있어야 소리가 있는 것이다. 소리는 타자를 체험하고 이해한 뒤에야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리는 소통이다.
 
계곡물이 내는 소리는 우리를 그리움의 세계로 이끌어준다. [중앙포토]

계곡물이 내는 소리는 우리를 그리움의 세계로 이끌어준다. [중앙포토]

 
물소리도 바위와 돌멩이, 나무뿌리와 이끼, 물고기와 가재, 나뭇잎 그림자와 달빛까지 마주치고 나서 자기가 받은 느낌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도 자기 속살을 환히 내보여가며 부끄러움도 잊은 채. 소리는 자신의 상태와 마음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물은 여성성을 상징한다. 물의 덕은 고요와 순수이며 따름을 뜻하는 순덕이다. 그러나 물이 껍질까지 다 까발렸을 때는 뜻밖의 힘이 솟구친다. 용트림하는 포효와 휩쓸고 가는 위력(威力)이 있다. 묘하게 한자 ‘위엄 위(威)’자의 부수가 계집 女이다. 위력은 곧 여성성의 힘이다.
 
계곡을 빙 둘러 솟아 있는 산등성이와 암벽이 그런 물소리에 반응한다. 인간의 귀에는 잘 들리지 않는 낮은 주파수의 메아리를 낸다. 숨은 벽들은 남성성을 상징한다.
 
그리움의 세계로 이끄는 물 소리
소리에는 인간의 언어를 넘어서는 무엇이 있다. 계곡물이 내는 소리는 우리를 그리움의 세계로 이끌어준다. 그리움은 무의식에 감추어진 것들이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다. 시공간에서 떠나보낸 이별을 재현해보는 것이다. 그리움은 이별과 슬픔에 대한 ‘애도 반응’이다. 남성은 애도 반응에 서툴다. 애써 묻어두려고만 한다. 그러다가 어떤 계기가 되면 표면으로 떠오른다. 그것도 다른 감정으로 왜곡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물소리가 주는 그리움은 앞으로 이끄는 힘이 있다. 물은 전진하는 순류가 대세이지 역류가 드물기 때문이다.
 
살기가 팍팍하고 힘겨울 때 가까운 계곡에 찾아가 발을 담그고 물소리에 귀 기울여보자. 그러면 살아있다는 느낌과 희망이 새록새록 솟아날 것이다.
 
윤경재 한의원 원장 whatayu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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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재 윤경재 윤경재 한의원 원장 필진

[윤경재의 나도 시인] 시를 시인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시쓰기를 어려워들 합니다. 그러나 시인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작품이든 아니든 시를 쓰면 모두 시인입니다. 누구나 그저 그런 일상을 살다가 문득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오래 기억에 남는 특별한 체험이라면 감정을 입혀 쓰는 것이 바로 시입니다. 시인으로 등단한 한의사가 연재하는 시를 보며 시인이 되는 길을 가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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