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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 신화의 해체

중앙일보 2018.06.07 01:23 종합 30면 지면보기
임장혁 중앙SUNDAY 차장

임장혁 중앙SUNDAY 차장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법원행정처 간부와 심의관들의 PC가 그것이다.  ‘김명수 대법원’이 열어 젖힌 상자에선 특정 성향 판사에 대한 인사 불이익의 증거 대신 ‘양승태 대법원’에서 꿈틀댄 뒤틀린 욕망의 흔적들이 쏟아져 나왔다.
 
상자 속 비밀들이 밝혀지는 사이 사법부의 풍경은 크게 변했다.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는 경구는 유물이 됐다. 요즘 법관들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말한다. 감정과 정서를 숨기지 않는다. 김명수 대법원장부터 그렇다. 그는 전임자를 검찰에 고발할 수도 있다는 말을 지난달 28일 출근길에 던졌고,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입장을 밝힌 지난 1일엔 “수많은 법관이 지켜온 자긍심과 국민이 사법부에 보내준 신뢰가 함께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충격”이라는 감성적 e메일로 맞불을 놨다. 양승태 대법원의 동향 파악 대상이 됐던 차성안 판사는 KBS 스튜디오에 등장해 “반대 목소리 내는 판사들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등등 8분여 동안 말했다. 억눌렸다고 느끼던 표현의 자유를 스스로 실현하려는 듯했다. SNS를 통한 정치적 표현에 열심인 판사도 있다.
 
판사가 법정에서 격정을 드러내 뉴스가 되는 일도 잦다. 지난 4월 김형두 부장판사(서울고법 형사5부)와 이성은 판사(서울중앙지법 형사19단독)가 그랬다. 김 판사는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하면서, 이 판사는 1980년대 고문 가해자 고병천(79)씨의 위증 혐의에 대한 재판에서 눈물로 사법부의 과오를 사죄해 눈길을 끌었다.
 
상자에서 나온 문건의 존재와 내용들로 재판이 권력기관 간 거래의 결과일지 모른다는 의혹이 커졌다면, 봉인 해제를 위한 판사들의 정치적 투쟁과 “나는 달랐다”는 자기 표현의 홍수는 재판이 판사의 정치적 자의(恣意)에 불과할 수 있다는 걱정을 키웠다. ‘판사는 법률에 따라 공정하게 재판한다’는 신화는 해체됐다. 최근 한 사법 신뢰도 조사에선 사법부를 ‘불신한다’는 응답이 63.9%에 달했다. 진보·보수나 연령층을 불문했다.
 
판도라의 상자 속엔 희망이 남았을까. 국민의 조건 없는 믿음이 정당성의 유일한 기반인 사법권력은 신뢰 회복의 수단이 마땅찮다. 진보 성향 법관 모임의 간사 출신(정계선 부장판사)이 이명박 전 대통령을 재판하듯 정치적 사건들을 과거와는 다른 성향의 법관에게 맡기면 회복될까. 대법원장에게 다른 묘수가 있을까.
 
곧 시민들은 판사들에게 유·무죄를 가르는 역할을 내려 놓으라고 요구할지 모른다. 배심제가 낫다고 생각할 수 있다. 대법원이 재판을 제대로 했는지 헌법재판소가 판단케 하자는 목소리가 커질 수도 있다. 판사들끼리 잘 해결하기를 기대하기엔 너무 나갔다.
 
임장혁 중앙SUNDAY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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