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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단독 인터뷰] ‘프리스비(원반) 슬라이더 인생’ 김병현의 심경고백

중앙일보 2018.06.04 10:51
MLB 한국인 최고 계약금, 유일한 양대 리그 챔피언 반지 낀 ‘행운아’…2016년 KIA에서 방출된 뒤 무적(無籍) 신세, 다시 운동하며 재기 노려
김병현이 월간중앙과 인터뷰를 마친 뒤 손에 공을 들고 먼 발치를 바라보고 있다. 특유의 무뚝뚝한 표정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아 보인다.

김병현이 월간중앙과 인터뷰를 마친 뒤 손에 공을 들고 먼 발치를 바라보고 있다. 특유의 무뚝뚝한 표정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선동열처럼 끝내고 싶었는데 인생, 내 마음대로 안 되더라”

BK 김병현(39). 야구팬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바로 그 이름이다. 아직도 깨지지 않는 메이저리그(MLB) 진출 한국인 역대 최고 계약금(225만 달러)의 주인공. 약관(弱冠)의 나이에 메이저리그(MLB)에 데뷔해 빅리그 무대를 들었다 놨다 했던 ‘한국형 핵잠수함’.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양대 리그(내셔널리그·아메리칸리그)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를 갖고 있는 행운아. 젊은 시절부터 수퍼스타였던 그는 그러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의 중심에 서는 것보다는 평범하면서도 조용한 삶을 즐겼다. 모범답안처럼 정해진 길을 걷기보다는 예상하지 못 한 행보를 선택해 모두를 깜짝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세상은 ‘프리스비(원반) 슬라이더’ 같은 그를 ‘풍운아(風雲兒)’ 혹은 ‘기인(奇人)’이라 불렀다.
 
메이저리그와 일본 프로야구를 거쳐 2012년 한국 프로야구로 돌아온 김병현은 2016년 KIA에서 방출되면서 유니폼을 벗었다. 누구나 예상한 은퇴. 그러나 그 스스로는 아직 “은퇴”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간혹 운동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기도 하고, 지난 겨울엔 윈터리그가 열리는 도미니카공화국으로 날아가 현지 팀의 유니폼을 입었다는 뉴스가 나오기도 했다. 최근 애리조나 구단 초청으로 오랜만에 메이저리그 마운드를 밟고 시구를 하고 돌아온 김병현을 월간중앙이 단독으로 만났다. BK 김병현이 그리고 있는 인생과 꿈은 무엇일까.
 
BK는 왜 아직 “은퇴”를 말하지 못 할까
KIA 시절의 김병현. 경기 도중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듯 입술을 깨물고 있다.

KIA 시절의 김병현. 경기 도중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듯 입술을 깨물고 있다.

“미국에 가서 시구하고 볼일 좀 보고 2주 전쯤 들어왔어요. 큰애가 초등학교 1학년인데 오늘 아침엔 애 학교 데려다주고 왔고. 요즘 이렇게 삽니다.”

 
근황부터 궁금했다. 그래서 만나자마자 “요즘 뭐하고 지내냐?”고 물었더니 특유의 호탕한 웃음과 함께 돌아온 말이다. 하긴, 그게 그다운 대답이다.
 
김병현은 경기도 일산에서 산다. 지난 1월에 만났을 때만 해도 그는 은퇴에 대해 “나도 아직 잘 모르겠다”며 웃었다. 당시 모교인 광주일고의 성영재 감독의 요청으로 일본 후쿠오카 전지훈련에 동행하기 직전이었다. 그는 그때 “전지훈련에 가서 후배들 봐주면서 같이 운동할 수 있으면 하고, 아니다 싶으면 (은퇴를) 결심할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다시 운동을 할 건가?”라고 물었다. 많은 이에게 이런 질문을 수없이 받았을 터이다. 그럴 때마다 같은 대답을 해야 하는 그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게 가장 궁금한 부분이기에 어쩔 수 없다.
 
“언제 조용히 나오면 그냥 다시 야구 시작하나 보다, 소식 없으면 야구 그만뒀나 보다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솔직히 ‘아직은 은퇴할 때가 아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제 나이도 있으니 제게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굳이 남들처럼 은퇴를 발표하거나 은퇴식을 할 필요는 없잖아요. 누구한테 허락받고 그만둬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웃음) 그만둘 땐 조용히 그냥….”
 
말하는 품새를 보니, 아직 가슴에서 야구라는 열정을 지우지는 못 한 듯하다. 머리에서 야구라는 미련을 버리지도 못한 듯하다. 그래도 상식적으로는 언뜻 이해하기가 어렵다. 2016년 11월 KIA에서 방출됐다.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2년 연속 소속팀도 없으니 보통사람의 생각으로는 ‘은퇴’가 맞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그는 왜 여전히 야구공을 내려놓지 못하는 것일까.
 
“나이가 들어서 야구를 그만둘 수는 있죠. 팔이 부러지거나 어깨 수술을 하거나 무릎 관절이 나가거나 하면 그만 둘 수도 있죠. 정상적인 몸인데 경기력이 안 나오면 저도 다른 사람들처럼 깔끔하게 ‘그만두겠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직 미련을 못 버리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뭔가 답은 찾고 싶어서입니다. 제 스스로 궁금한 부분들이 있는데 그것은 찾고 그만두고 싶어요.”
 
무엇을 찾겠다는 뜻일까. 그리고 어떻게 찾겠다는 얘기일까. 그의 말을 좀 더 들어봐야 알 것 같았다. “몇 년 전부터 이런 얘기를 계속 반복하고 있는데 다른 분들은 이해를 못 해요. 과거의 좋은 기억이 제 머릿속에 있는데 그게 안 나오니까 답답한 거죠. 누구한테 이걸 말할 수도 없는 거고….”
 
그가 말하는 ‘좋은 기억’이란 메이저리그 데뷔 초기였던 1999년과 2000년 즈음의 기억을 가리킨다. 그는 성균관대 2학년 때인 1999년 2월에 애리조나와 한국인 역대 최고 계약금인 225만 달러에 사인하고 미국 무대로 진출했다. 그리고는 두 달 만에 더블A와 트리플A를 초토화시킨 뒤 5월 30일 뉴욕 메츠전을 통해 빅리그 데뷔전을 치르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당시 메츠전에서 8대 7로 앞선 9회말 등판한 그는 상대 중심타선인 에두아르도 알폰소-존 올러루드-마이크 피아자를 순식간에 돌려세우며 경기를 마무리했다. 특히 당대 최고의 공격형 포수 피아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우는 장면은 충격과 공포라고 하기에 충분했다.
 
36세이브 거뒀던 2002년, 그러나 내 공 못 던졌다
보스턴 시절 김병현의 역동적인 투구 동작. 다이내믹한 폼을 통해 김병현만의 ‘뱀직구’를 뿌렸다.

보스턴 시절 김병현의 역동적인 투구 동작. 다이내믹한 폼을 통해 김병현만의 ‘뱀직구’를 뿌렸다.

그러면서 애리조나의 핵심 불펜투수로 자리 잡았다. 2000년에는 당시 팀의 마무리투수인 매트 맨타이가 팔꿈치 통증을 호소하고 이후 수술을 하면서 김병현은 단숨에 소방수 보직을 꿰찼다. 거칠 것이 없었다. 2000년 6승14세이브, 2001년 5승19세이브, 2002년 8승36세이브를 올리며 승승장구했다.
 
특히 2000년엔 61경기에 등판해 70.2이닝을 던지며 111탈삼진(9이닝당 14.14탈삼진), 2001년엔 78경기에 나서 98이닝을 던지며 113탈삼진(9이닝당 10.38탈삼진), 2002년엔 72경기에 올라 84이닝을 소화하며 92탈삼진(9이닝당 9.86탈삼진)을 기록하며 메이저리그에서도 초특급 삼진 능력을 자랑했다.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최고 타자들이 그의 불 같은 강속구와 현란한 변화구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2001년엔 메이저리그 올스타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그 시절부터 자신의 공을 던지지 못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2000년 봄까지 좋았던 것 같아요. 제 공을 던지던 시기는 그때까지였어요. 2001년엔 월드시리즈에서 홈런을 맞았지만 어쨌든 우승했고, 2002년엔 숫자상으로는 성적이 더 좋았어요. 주변 사람들도 기록만 보고는 ‘와~ 잘한다’ 그랬지만 제가 속으로 느끼기엔 그때 던지던 공은 제 공이 아니었어요. 몸이 안 좋아 변칙을 쓰고 있었던 거였죠. 1이닝이나 2이닝은 그동안 해온 게 있으니까 변칙으로, 우격다짐으로 던질 수 있었지만 스스로는 내 몸이 점점 무거워지고 투구폼, 미캐닉(역학)이 좋지 않다는 걸 느끼고 있었습니다. 잘못된 운동습관, 식습관 등으로 저만의 것이 깨진 거였죠. 그걸 찾고 싶어서 이후 공을 많이 던지는 선발로 뛰기를 원했고, 일본에 갔다가 한국까지 왔어요. 그동안 조금씩 좋아지고 있었지만 성에 안 차고…. 혼자서 계속 그것을 찾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아직도 ‘은퇴했습니다’라고 말도 못 하고 ‘다시 하겠습니다’라고 말도 못 하고 있는 것 같아요.”
 
난해한 말이다. 2000년 봄의 기억이라면 벌써 18년 전의 일이다. 1979년생. 이제 우리나이 마흔 살이다. 아무리 운동 신경이 탁월하다고 해도 세월을 거스를 수 있을까. 18년 전의 몸과 구위가 회복될까. 그가 찾는 정답은 그 시절의 몸 상태와 구위만은 아니었다. 설명을 들어보니 어쩌면 당시의 투구 밸런스와 공이 손끝을 떠날 때 전해지는 느낌, 그것에 가까운지 모르겠다.
 
“야구는 숫자가 중요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거든요. 약간 묘한 게 있어요. 잘 맞았는데 아웃되고, 빗맞았는데 안타가 되는 게 야구죠. 그 안에서 나 스스로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저는 잘 맞았는데 수비수가 잘 잡아주는 게 썩 좋지는 않아요. 누구는 속으로 ‘재수’라고 좋아하면서 끝내버릴지 모르지만 저는 그게 안 되더라고요. 제대로 된 공을 던지면 방망이가 밀리거나 헛스윙이 돼야 하는데 그게 아니면 자꾸 생각을 하고 속으로 들어가요. 타자들하고 싸워야 하는데 난 나 자신과 싸우고 있었으니까 좋은 결과가 나올 수가 없었을지 몰라요. 1이닝씩만 던졌다면 기록적으로는 좋았겠죠. 몸이 50~60%도 안 되는데 시속 140㎞ 이상 던졌고. 속으로 ‘다행이네’ 생각하면서도 ‘왜 옛날 몸이 안 되고 공이 안 나올까’ 그런 생각에 갇혀 있던 거죠.”
 
그렇다면 그는 왜 좋았던 기억을 잃어 버렸던 걸까. 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원인부터 알아야 했다. 그는 “너무 어릴 때 미국에 갔던 것 같다”며 다소 의외의 말을 꺼냈다.
 
“생활도 바뀌고 환경도 바뀌고 먹는 것도 바뀌면서 그동안 걷던 길과는 완전히 다른 길로 간 것 같아요. 말도 안 통하고 어린 나이에 혼자 살다 보니 콜라·사이다·피자·햄버거 같은 걸 너무 많이 먹었어요. 고기도 너무 많이 먹었고. 식습관과 생활습관이 바뀌다 보니 체질이 바뀌고, 몸이 바뀌니 제가 갖고 있던 투구 폼, 공도 달라졌던 것 같아요. 처음에 추가 조금 기울어졌을 땐 몰랐죠. 1이닝씩 던지고 구속도 잘 나오고 했으니까. 그런데 점점 추가 많이 기울어지면서 결국 제 것을 잃어 버린 거였어요.”
 
그는 KIA에서 뛰던 마지막 시즌부터 고기와 밀가루 음식을 끊고 식습관을 바꿨다. 한때 몸무게가 93㎏까지 나갔지만, 식이요법을 통해 지난겨울엔 80㎏까지 뺐다. 메이저리그 시절 한창 좋을 때 78㎏에 근접하는 몸무게였다. 그 시절의 체중으로 돌아가 공을 던지고 싶었다. 그리고는 지난겨울 윈터리그가 열리는 도미니카공화국까지 날아갔다. 당시 히간테스 델시바오 팀의 유니폼을 입은 김병현의 사진이 공개되자 은퇴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던 한국 팬들은 모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정식 경기에 등판하지는 않았지만 날렵해진 몸으로 불펜투구를 하고 청백전도 뛰면서 스스로를 테스트했다.
 
철없던 어린 시절, 한국에서 프로를 배웠더라면…
광주일고 출신 ‘메이저리거 삼총사’ 최희섭·서재응·김병현 (왼쪽부터). 서재응이 1996년, 김병현이 1997년, 최희섭이 1998년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광주일고 출신 ‘메이저리거 삼총사’ 최희섭·서재응·김병현 (왼쪽부터). 서재응이 1996년, 김병현이 1997년, 최희섭이 1998년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몸이 가벼워지고 좋았거든요. 옛날 느낌이 나더라고요. 근데 타자들의 배트가 밀리는 게 느껴지고 감독도 ‘공 좋다’고 하는데 구속을 물어보니 135㎞라고 하더라고요. 당시에는 공을 던지면서 한창 좋았을 때의 느낌이 나오는 것 같아 기대에 부풀었는데 구속이 안 나오니까 또 혼자 궁금증이 생겼어요. 그래서 이렇게 식이요법을 하는 게 맞는지 여기저기 물어보고 그랬어요. 지금은 고기를 조금씩 먹으면서 살이 좀 쪘죠. 현재 몸무게는 86㎏ 정도 나가요.”
 
메이저리그는 그에게 부와 명예를 안겨 줬다. 지금도 그라운드에 김병현의 잔상이 남아 있는 것도 그 시절의 임팩트가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소 의외지만, 그의 말을 들어보면 너무 어릴 때 미국에 가면서 혼돈의 시기를 겪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어린 나이에 미국에 가서 많은 것도 얻었지만 많은 것을 잃기도 했다”고 돌이켰다. 초고속으로 메이저리그에 직행한 것이 독이 됐는지도 모르겠다는 설명이었다.
 
“제가 아쉬워하는 부분 하나가 뭐냐 하면, 차라리 어릴 때 메이저리그에 먼저 가지 않고 한국에서 야구를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거예요. 프로에 들어가서 선배들한테도 몸 관리하는 것도 배우고, 언론 관계도 배우고, 사회성도 배우고 했으면 지금도 안 다치고 성장을 하고 있었을 것 같아요. 기인도 안 됐을 거고.(웃음) 아니면 차라리 첫해 곧바로 메이저리그에 가지 않고 마이너리그에 더 오래 있었다면 어땠을까 싶어요. 마이너리그는 새벽 5~6시에 일어나 운동을 하니까 더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몸 관리를 했을지 모르죠. 갑자기 메이저리그에 올라가면서 그냥 알아서 하다 보니까 한국에서 좋았던 걸 미국에서 다 잃어 버렸던 것 같아요.”
 
그는 당시 언론 인터뷰를 기피하는 인물로 통했다. 팬들과 만나기를 꺼려하는 선수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서도 그는 “세상을 잘 몰랐던 것 같다”고 했다.
 
“그때 난 미국에서 야구만 했고 혼자 조용히 있었어요. 한국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 몰랐죠. 겨울에 한국에 왔는데 갑자기 모르는 사람들이 저한테 아는 척하고 그래서 당황했어요. ‘난 이 사람 모르는데 왜 이 사람이 왜 나를 아는 척하지?’ 그랬죠. 지금은 미국에 있어도 스마트폰이 있으니까 한국 가족과 친구들과도 영상통화도 하고, 인터넷으로 한국 뉴스도 보고 그러잖아요. 당시에는 슈퍼 가서 전화카드 사서 전화만 하던 시절이니까 갑자기 저한테 몰려오는 관심이 부담스러웠던 것 같아요. (박)찬호 형은 LA에서 한인들과도 많이 만나고 LA 지역에서 한인들이 발행하는 신문들도 보고 하니까 한국 돌아가는 사정도 잘 알았겠지만 저는 몰랐거든요. 만약 한국 프로야구에서 뛰면서 언론과 팬들과의 관계에 대해 배우고 미국에 갔더라면 다르지 않았을까 싶은 거죠.”
 
대부분의 팬은 그가 선발투수 욕심을 내지 않고 마무리투수로 뛰었다면 메이저리그에서도 불멸의 기록을 남기는 소방수가 됐을지도 모른다고 안타까워하고 있다.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최근 김병현은 애리조나 역대 최고의 마무리투수로 공인받았다. 올해는 1998년 메이저리그 무대에 선을 보인 애리조나 구단의 창단 20주년. 미국 스포츠전문매체 [SB네이션]은 애리조나 창단 20주년을 맞아 각 포지션별 역대 최고 선수를 투표로 받았는데 김병현은 애리조나 역대 마무리투수 부문에서 1위에 올랐다. 그리고 지난 4월 3일 애리조나 구단은 김병현을 초청해 시구를 하는 영광의 무대를 마련했다. 이날은 LA 다저스의 류현진이 상대팀 선발투수로 등판하는 날이어서 더욱 의미가 깊었다. 김병현 역시 즐거운 추억을 만들고 왔다.
 
“이번에 애리조나에 가니까 옛날 생각이 많이 나더라고요. 구장 이름만 뱅크원볼파크에서 체이스필드로 바뀌었지 거의 그대로였어요. 제가 뛸 때 클럽하우스에서 친했던 클러비(클럽하우스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머리가 희끗희끗 나고 아직도 일하고 있더라고요. 또 ‘수잔’이라는 여성팬이 있었어요. 허스키한 목소리로 항상 ‘헤이, BK, 컴온!’ 그랬는데 그날도 예전에 항상 앉아 있던 그 관중석에 앉아 있더니 시구하러 온 나를 보고는 울려고 하더라고요. 거의 할머니가 다 됐더라고요. 세월이 그렇게 흘렀구나 싶더라니까요.”
 
인생은 죽을 때까지 도전, 그래서 야구 지우지 못 해
2001년 애리조나의 월드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고 있는 김병현.

2001년 애리조나의 월드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고 있는 김병현.

그가 시구를 위해 마운드에 올랐을 때 모두들 특유의 잠수함 투구를 기다렸지만 그는 예상하지 못한 오버핸드 투구를 했다. 보통 시구자는 공을 받아준 포수와 인사를 나누지만, 그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황급히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그다운 모습이었다. 결국 뒤늦게 포수가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기념촬영을 하면서 모두를 웃게 만들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는 애리조나에서 야구하던 시절이 인생의 황금기였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마운드 위에서의 기억과는 달리 야구장 안에서의 기억은 외로움의 흔적도 남아 있더란다. “요즘엔 통역이 더그아웃에 들어가지만 당시엔 통역이 더그아웃에 못 들어갔거든요. 혼자 영어사전 가지고 가서 무슨 말 하는지 해석하고….(웃음) 어린 나이에 힘들고 외로웠던 시절이기도 했죠.”
 
이번 미국행은 은퇴를 고민하던 그에게 다시 도전의 작은 불꽃을 일깨워 준 계기가 됐다. 잠을 자면서도 다시 야구하는 꿈을 꾸고 있다고 한다.
 
“미국 가서 시구하고 나서부터 요즘 잠자리에서 기분 좋은 꿈을 꿔요. 야구를 하고 있는 꿈을요. 야구장 갔다 오니까 옛날에 야구했던 기억이 좀 많이 났나 봐요. 그때 봤던 친구들도 만나고 하니까. 야구하는 꿈을 꾸면서 ‘됐다. 아, 내걸 찾았구나. 내가 야구를 하는구나’ 그랬는데, 꿈에서 깨면서 ‘꿈이네?’ 그러고 있어요. 그러면서 속으로 ‘아, 내가 아직 겉돌고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사실 예전 어릴 땐 저도 선동열 감독님처럼 정상에서 은퇴를 하려고 했거든요. 멋있게. 그런데 인생이 내 맘대로 흘러가지는 않더라고요. 그냥 지금은 ‘아직 은퇴할 때가 아니니까 기다리자’ 하고 있어요. 그래서 인터뷰하는 것도 솔직히 부담스럽기도 하고요. 이도 저도 아닌데 항상 했던 말 똑같이 한다는 게…. 야구는 정말 제게 많은 것을 줬죠. 그런데 야구 때문에 또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어요. 인생은 죽을 때까지 도전이잖아요. 하고 싶은 것도 다 때가 있고, 운동도 때가 있으니까 할 때까지 해보려고 하는 거죠. 은퇴는 나중에 해도 되지만 선수는 나중에 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야구를 지우지 못 하고 이러고 있어요.”
 
[박스기사] 김병현 “내 인생 바꾼 추억 3가지” - 아버지와 고교 선배 방수원 그리고 성균관대와 해태
 
1. “너에게 야구를 허하노라”
 
“아버지가 예전에 태권도 선수를 하셨어요. 어릴 때 관장을 하셨는데 저도 유치원 때부터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태권도를 배웠죠. 야구는 4학년 때부터 시작했어요. 각 반에 체육부장 선생님이 돌아다니면서 운동 잘하는 애들 모아놓고 공을 던져 보라고 하더라고요. 멀리던지기 잘했더니 야구를 해보라고 하셨어요. 그렇게 야구를 시작하게 됐죠.”
 
집안의 반대는 있었다. 1남 3녀로, 위로 누나 한 명과 아래로 여동생 두 명이 있다. 어머니는 “집안에 아들 하나인데 공부를 해야 한다”며 아들이 야구선수가 되는 걸 못마땅해 했다. 그러나 운동선수 출신의 아버지는 걸핏하면 싸움하고 다니는 골목대장 아들에게 “야구를 하면 사고 치지 않을 것 같다”면서 야구를 허락했다고 한다. 김병현은 “제가 공부 안 하기 잘했죠. 엉덩이가 뜨거워서 한 자리에 오래 앉아있지 못 하거든요”라며 웃었다.
 
2. “언더핸드로 던지는 게 좋겠다”
 
김병현은 광주일고 시절부터 특급 잠수함투수로 전국에 이름을 알렸다. 1학년 때인 1994년 무등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우수투수상을 받았다. 타격에도 소질이 많았다. 2학년 때인 1995년 청룡기에서는 투타에서 맹활약하며 최우수선수상을 받았다. 당시 23이닝 연속 무실점에 총 28이닝 1실점의 역투를 펼쳤다. 3학년 때인 1996년에는 대통령배 최다안타상과 대붕기 타격상을 휩쓸기도 했다. 그러면서 고교 2학년 때인 1995년부터 청소년대표에 발탁됐다.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할 때 중국전에서 8연속 타자 탈삼진을 비롯해 6이닝 12탈삼진을 기록했고, 한미대학선수권대회에서는 6.2이닝 동안 15탈삼진을 기록하면서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의 표적이 됐다. 그리고는 성균관대 2학년을 중퇴하고 1999년 애리조나와 계약금 225만 달러를 받고 메이저리그 무대에 진출해 ‘한국형 핵잠수함’의 위용을 발휘했다.
 
그는 어떻게 잠수함 투수가 됐을까. 김병현은 원래 오버핸드 투수였다고 한다. 무등중학교 3학년 때 잠수함 투수로 변신했다. 그는 이에 대해 “방수원 선배님 때문에 우연히 그렇게 됐다”며 웃었다. 방수원은 프로야구 원년 멤버로 1984년 5월 5일 삼미전에서 KBO리그 역대 1호 노히트노런을 기록했던 투수다.
 
“제 기억엔 방수원 선배님이 학교에 놀러 오셨는데 감독님하고 우리가 야구하는 걸 보셨어요. 쉬는 시간이었나, 제가 애들하고 언더로 던지면서 놀고 있으니까 ‘이리 와보라’고 하시더니 ‘언더로 던져 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때 방 선배님이 ‘언더로 잘 던지니까 이렇게 던지는 게 좋겠다’고 하셨어요. 감독님도 그렇게 던지라고 하시고. 제 기억으로는 오버로 던질 때 공이 많이 떴어요. 더 차고 올라와 높은 볼이 많았다고 해야 하나? 사실 제가 어렸을 때 짱돌을 언더로 더 잘 던지긴 했어요. 더 멀리 던지고. 그래서 그때부터 잠수함투수의 길로 들어섰던 거죠. 근데 제가 계속 오버로 던져도 잘 던졌을 것 같긴 해요.(웃음)”
 
3. 프로와 대학 사이에서
 
김병현은 고교 졸업반 때 해태와 성균관대의 스카우트 싸움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다. 바로 프로에 직행할 수도 있었지만 성균관대를 선택했다. 그는 야구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꼽아달라는 말에 당시를 회상했다.
 
“고3 때 해태 쪽에서 얘기가 있었는데 계약금으로 3억4000만원인가 준다고 했어요. 전년도에 고(故) 김상진 형이 1억2000만원인가 받았는데 엄청나게 큰 금액이었죠. 그렇지만 그때는 바로 프로에 가는 것보다 다들 대학 가는 분위기였죠. 당시 집안 형편이 썩 좋지는 않았을 때였어요. 하루는 아버지가 ‘서울에 갔다 와야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리고는 서울에 다녀오시더니 ‘성대 체육실장님하고 감독님하고 만나고 식사하고 대접 잘 받고 왔다’고 하더라고. 그러면서 통장 하나를 꺼내셨는데 지금도 기억이 나요. 장학금이라면서 통장을 보여주시는데 숫자 2 다음에 동그라미가 계속 있더라고요. 2억원이었어요. 당시엔 엄청 큰돈이었죠. 그때 ‘아, 우리 가족 걱정 없이 살 수 있겠구나’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때 ‘야구하기 잘했구나’라고 생각했어요. 제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그때였던 것 같아요.”
 
김병현은 이때 성균관대로 진학했기 때문에 일찌감치 1999년 메이저리그 진출이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만약 해태에 입단했더라면 프리에이전트(FA) 자격을 얻고 나서야 해외 무대를 노크했을지 모를 일이다.
 
※ 김병현은 누구?
 
출생연도: 1979년 1월 19일
출신교: 광주 수창초-무등중-광주일고-성균관대(2년 중퇴)
 
메이저리그(MLB) 활약상
계약: 1999년 애리조나와 계약금 225만달러 계약(MLB 진출 한국인 역대 최고 계약금)
데뷔: 1999년 5월 30일 뉴욕 메츠전 1이닝 0안타 1탈삼진 무실점 세이브
경력: 애리조나-보스턴-콜로라도-플로리다-애리조나(1999~2007년)
통산 성적(MLB): 394경기(선발 87경기) 54승 60패 86세이브 21홀드 평균자책점 4.42
 
일본프로야구(NPB) 활약상
경력: 라쿠텐 골든이글스(2011년)
통산성적(NPB 2군): 8경기·평균자책점 2.66
 
한국프로야구(KBO리그) 활약상
경력: 넥센-KIA(2012~2016년)
통산성적(KBO 1군): 78경기 11승 23패 5홀드 평균자책점 6.19(1군)
 
학생 시절 주요 수상
1994년: 무등기 우수투수상(광주일고 1학년),
1995년: 청룡기 최우수선수상 및 무등기 타격상(광주일고 2학년),
1996년: 대통령배 최다안타상 및 대붕기 타격상(광주일고 3학년)
 
기타 주요 경력
1995년, 1996년: 세계청소년선수권 국가대표,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 국가대표 금메달,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국가대표 4강, 2001년 MLB 올스타, 2018년 미국 [SB네이션] 애리조나 올타임 올스타 마무리투수 부문 팬 투표 1위
 
- 글 이재국 MBC 스포츠플러스 ‘야구중심’ 전문패널 keystone71@naver.com / 사진 김현동 기자 kim.hd@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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