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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스틱도 브라도 버렸다···'탈코르셋' 외치는 여성들

중앙일보 2018.06.03 09:00
최근 여성들이 트위터나 인스타그램 등 자신의 SNS에 올리고 있는 탈코르셋 인증글들. [인터넷 캡처]

최근 여성들이 트위터나 인스타그램 등 자신의 SNS에 올리고 있는 탈코르셋 인증글들. [인터넷 캡처]

 
5년 차 직장인 김은영(30)씨는 한 달 전부터 출근 전 매일 선크림 정도만 바르고 회사에 간다. 언제서부턴가 '난 도대체 누구를 위해 기를 쓰고 화장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다. 처음엔 주위 시선이 좀 신경쓰였지만 예상외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꾸미는 시간이 줄어드니 삶은 윤택해졌다. 김씨는 "'좀 아파 보인다'는 말은 들었지만 지적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적어 신경쓰일 정도는 아니었다"며 "그동안 나 자신을 스스로 만든 틀 안에 가둬놓았던 건 아닌지 되돌아보게 됐다"고 했다.
 
늘 해오던 화장을 지우고 렌즈 대신 안경을 쓴다. 잘 길러온 머리를 제멋대로 자르고 편한 속옷을 입는다. 최근 여성들 사이에서 활발히 벌어지고 있는 '탈코르셋' 운동이다. 탈코르셋은 말 그대로 코르셋에서 탈피하겠다는 의미다. 중세시대부터 여성들이 잘록한 허리라인을 만들기 위해 착용한 코르셋처럼 사회가 원하는 '예쁜 모습'을 거부하려는 움직임이다.
 
최근 인스타그램·트위터 등 소셜미디어에서는 연일 탈코르셋을 해시태그(#)로 단 '인증샷'들이 올라오고 있다. 일부러 부러뜨린 립스틱, 바닥에 흐트러진 머리칼 사진 등 다양하다. 주로 10대~20대 여성들이다.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탈코르셋 인증을 한 여성들에게 '왜 탈코르셋을 하게 됐는지' 메시지를 보내 물었다. 답장이 돌아왔다.
 
"한때 잠을 줄여가며 치렁치렁 기른 머리카락을 감고 말리고 고데기로 보기 좋게 스타일을 손봤으며, 머리에 어울리는 옷을 입고 화장을 했습니다. 밖에서도 화장이 번지거나 들뜨진 않았는지 늘 확인했죠. 고작 예쁘기 위해서요. 그때는 자기만족이라 생각했던 꾸밈이 제 자유를 빼앗고 있다는 걸 몰랐습니다. 누군가 더 일찍 제게 '예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줬다면 좋았을 것 같아요. 그래서 다른 여자들에게 (탈코르셋한) 절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숏커트한 사진을 올린 20대 초반 대학생 A씨)
 
"그냥 화장을 굳이 해야 되나 싶고, 남성은 그만큼 안 꾸미는데 나도 꾸미고 다녀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해 탈코르셋을 하게 됐습니다." (부순 화장품 사진을 올린 20대 여성 B씨)
 
"(코르셋은) 쟤가 해서 나도 하고, 내가 해서 남도 했겠다 싶더라고요.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렌즈에 눈이 충혈되는 일, 브래지어에 숨이 막히고 땀이 차는 일, 피곤한 몸으로 화장을 지우는 일, 구두에 발이 상하는 일 등은 본인이 바라고 하는 일은 아닐테니까요." (부러진 립스틱 사진을 올린 고등학생 C양)
 
탈코르셋을 주제로 한 웹툰. [인터넷 캡처]

탈코르셋을 주제로 한 웹툰. [인터넷 캡처]

 
조한혜정 연세대 명예교수는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과거 여성들은 힘을 갖기 위해 문화나 제도를 바꾸기보다 '사회가 원하는 모습'대로 맞춰 살아가는 데 집중했고 소비시장에서도 여성들에게 '섹시하지 않으면 경쟁에서 탈락한다''예쁘지 않으면 지는 거다' 식의 인식을 주입해왔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러다 보니 사회 곳곳에서는 성희롱 등 권력자들의 폭력이 계속됐고 최근 이어진 미투 운동은 여성들에게 '나 왜 이렇게 살아왔지?' 자각하는 계기를 만들어줬다"고 진단했다.
 
미국에서는 탈코르셋 운동이 1960년대부터 있었다. 1968년 9월 미국 애틀랜틱 시티에서 미스 아메리카 대회가 열렸을 때다. 대회장 밖에서는 이 대회에 반대하는 200여 명의 여성이 '자유의 쓰레기통'(Freedom Trash Can)이라고 이름 붙인 쓰레기통에 치마와 속옷, 가짜 속눈썹 등을 버리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탈코르셋은 1970년대 초반 미국 여성 해방 운동의 주요 의제였다. 현재 우리나라 젊은 여성들이 주도하고 있는 탈코르셋 인증도 이 운동과 맥이 닿아있다"고 분석했다.
 
여성들이 많이 활동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어디까지가 코르셋인가'에 대한 논쟁도 활발하다. "꾸미는 건 자기만족이다""무조건 숏커트만 하면 자유로워지는 건가" 등 탈코르셋에 의문을 제기하는 시선부터 "그것 또한 코르셋에 갇힌 시각이다"라는 주장까지 다양한 의견들이 오간다. 이 교수는 "탈코르셋은 여성들의 자기성찰적 운동이다. 이들이 코르셋을 인지하고 그것에 대해 논쟁을 벌이며 의식을 넓혀가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홍상지 기자 hongs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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