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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언의 시시각각] ‘어벤져스’ 판사들의 비극

중앙선데이 2018.06.02 01:00 586호 34면 지면보기
이상언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

2014년 12월 19일 국회에 ‘상고법원’ 설치에 필요한 법원조직법 개정안이 발의됐다. 대표 발의자인 판사 출신 홍일표 의원을 비롯해 168명이 의안에 이름을 올렸다. 재적 의원의 절반보다 20명이 많았다. 이처럼 다수의 의원이 서명을 하기까지에는 대법원 법원행정처 소속 판사들의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 그들은 학연·지연·사회연 등을 총동원해 의원들을 접촉하고 설득했다.
 

엘리트 법관들 상고법원 총력전
목적 위해 수단 적절성에 눈감아

대법원이 상고법원 설립을 위해 전력을 다한 2014년과 2015년, 이 일을 맡은 법원행정처 간부들은 ‘어벤져스’급 판사들이었다. ‘성골’(聖骨), ‘실세’, ‘최고 엘리트’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법관들이었다. 사령탑에는 박병대 처장이 있었다. 그의 별명은 ‘사법행정의 달인’이다. 지난해 대법관 임기를 마칠 때까지 32년간 법관 생활을 했는데, 그중 11년을 행정처에서 보냈다. 어벤져스의 좌장 격인 ‘아이언맨’처럼 전략 수립과 실행을 총괄했다. 박 처장 아래에는 임종헌 기획조정실장이 있었다. 이른바 ‘재판 거래’ 의혹을 부른 문건들은 그가 사용한 퍼스널컴퓨터(PC)에서 나왔다. 그는 ‘토르’처럼 목표를 향해 우직하게 갔다. 한승 사법정책실장은 국회나 토론회 등에서 상고법원의 필요성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일을 했다. 아이디어가 많고 지략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어벤져스의 ‘호크아이’쯤에 해당한다. 윤성원 사법지원실장은 호방한 성품으로 법원 내·외부에서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했다. 선이 굵은 이미지가 ‘헐크’를 닮았다. 이들의 주변에는 ‘주니어 히어로’급의 판사들이 포진해 있었다.
 
이 행정처 어벤져스들은 부지런하고, 성실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치인·법조인 등 상고법원 설립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술자리를 피하지 않았는데, 끝까지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수재’라는 소리 들으며 좋은 학교 다니고 사법시험 성적도 선두권이었던 만큼 보유한 인맥도 훌륭했다. 게다가 겸손하기까지 했다. 이들은 살인적 업무 부담에서 대법관들을 해방시키고, 동시에 고위 법관 인사 적체 문제도 해결하는 상고법원 설립을 위대한 사명으로 받아들였다.
 
‘다 된 밥’ 같았던 상고법원 도입은 국회 법사위에서 제동이 걸렸다. 새누리당 위원들의 반대가 특히 문제였다. 어벤져스들은 청와대를 통해 여당의 협조를 얻어내려 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악당 ‘타노스’가 등장했다. 우병우 당시 민정수석이었다. 그가 길목을 지키면서 방해했다. 특유의 ‘다른 사람 기분 나쁘게 하는’ 기술로 어벤져스들을 불편하게 했다. 당시 행정처에서는 “청와대가 상고법원을 ‘인질’로 잡고 법원을 움켜쥐려 한다”는 말이 나왔다. 우 전 수석은 법원의 ‘공적 1호’가 됐고, 어벤져스들은 다급해졌다.
 
2015년 7월에 행정처가 양승태 대법원장과 박근혜 대통령의 독대를 앞두고 만든 문서에는 ‘그동안 사법부가 VIP(대통령)와 BH(청와대)의 원활한 국정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해 권한과 재량 범위 내에서 최대한 협조해 온 사례를 설명’이라는 문구와 함께 KTX 해고 승무원 사건, 전교조 시국선언 사건 등이 언급돼 있다. 문건 작성 관련자들은 행정처나 대법원장이 재판에 개입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을 조사한 대법원 특별조사단도 “재판 결과를 유화적 접근 소재로 이용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미 법원에 대한 신뢰는 아물기 쉽지 않은 상처를 입었다.
 
히어로들은 법을 어겨도 세상을 구하기만 하면 박수를 받는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영화 속 이야기다. 행정처 간부들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일찍 깨달았어야 했다. 그들은 초능력자가 아니라 법률과 상식을 지키는 데 앞장설 책무가 있는 법관들이었다.  
 
이상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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